간헐적이고 사회적인 비건 Vegan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건강하기

by Yujin


그는 B형 간염 보균자였다.

도면을 쓱쓱 그리고 견적을 내어 필요한 재료와 인력을 투입하고 공사를 완성하는 기술자. 훤칠한 키와 체격, 적당히 햇볕에 그을린 피부와 잘 생긴 얼굴, 친절과 위트를 겸비한 그는 누가 봐도 호인이었다. 술 담배를 하지 않는 성실한 사장이자 자상한 남편이었던 나의 아버지는.

주말이면 아빠는 일찍 일어나 혼자 휘 나가는가 싶더니 상쾌한 아침 공기와 함께 엄마가 좋아하는 빵을 한가득 사서 들어왔다. 뷔페라도 다녀오신 날은 주머니에 엄마에게 줄 연잎밥 한 덩이쯤은 들어있게 마련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그리고 3학년 때 한 차례씩 아버지가 쓰러져 위독하니 바로 하교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간경변이 진행되고 있었다. 푹 쉬어야 했지만 그는 쉴 수 없었다. 공사의 진행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줄을 서 있고, 작업과 생계를 대신 책임질 사람은 없었으니까.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계획했던 진로를 포기한 나는 주변의 권유한동안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책상 아래로 발을 뻗어야 겨우 누울 수 있는 고시원에서 창문조차 없이 지내도, 교재비와 학원비 등 돈 들 은 많았다. 매일 먹는 김밥에 질려 3개에 1000원 하는 크림빵을 슈퍼에서 먹으며 '눈물 젖은 빵'을 실감하던 어느 날.

전화가 다. 울먹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 공주야 어떡하니... 아빠가... 아빠가 암 이래..."


갑자기 살이 10kg도 넘게 빠져 병원에 갔더니 간암이라고 했단다. 거래처가 부도를 내면서 아빠 역시 부도가 나고 고향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친했던 지인은 하루아침에 어디다 돈을 숨겼냐며 멱살을 잡는 채권자가 되었다. 마음의 상처가 암을 터뜨린 걸까.

짐을 정리하고 엄마, 아빠와 다 함께 오빠네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가족이 모였으니 이겨낼 수 있다, 너무 걱정하지 말자고 나는 짐짓 밝게 말했다. 수술과 치료를 받는 동안 매일 기도하고 함께 생채소와 현미밥 위주의 자연식을 먹으며 아빠를 응원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실감 나지 않는 3일장은 3달처럼 길게 느껴졌고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도 저렇게 갑자기 허무하게 죽는 거라면 매일 아등바등 살 필요가 있을까. 아프면 쉬고 하고 싶은 일 다 하면서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무슨 일을 할지 모르겠으니 일단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자는 생각도 사라졌다.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살아있는 이 소중한 시간을 '안정' 따위를 추구하는 데 쓰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일찍 떠나고 싶지 않았다. 아프고 싶지 않았다. 그때부터 음식, 운동, 쓰는 물건 등 모든 것에 대해 '건강'하려고 노력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려면 우선 건강하고 볼 일이었다.


피부에 흡수되는 로션과 에센스, 비누, 치약, 샴푸와 컨디셔너, 바디워시부터 안전한 원료로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설거지 및 세탁 세제와 섬유유연제는 베이킹소다와 과탄산소다, 식초로 대체했다. 산책과 cardio(심장 강화 운동)부터 요가, 마라톤, 스노보드, 벨리댄스, 스윙댄스, PT, 발레, 수영 등 몸을 움직이는 일들도 바꾸어가면서 했다. 맛과 영양을 최대한 살리는 베이킹을 하고 건강에 대한 책을 즐겨 읽었다. 무엇보다 마음의 평온함을 추구했다. 몸이 고달플지라도.




비건 Vegan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접한 것은 런던에서다. 여러 번 들어본 단어였지만 한국에서는 흔하지 않아서인지 선뜻 관심이 가지 않던 터였다. 그런데 고기뿐만 아니라 유제품과 난류, 꿀에 이르기까지 동물에게서 얻는 재료는 일절 쓰지 않는 완전한 채식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그곳엔 흔했다. 먹고 마시며 경험해보니, 비건이라면 좋아하는 빵을 마음껏 먹으면서도 충분히 건강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비건을 지향한다. 지능과 사회성이 있고 생생한 고통을 느끼는 동물들을 먹이로 학대하는 현실이 괴로워서, '죽은 시체'를 먹기 싫어서, 탄소 배출을 줄이고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종교적인 이유 등등. 비건은 좁게는 특정 식생활 또는 그런 식생활을 하는 사람을 일컫지만 넓게는 자연과 생명을 존중하는 생활양식이나 이념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이고 있다. 내가 비건을 실천하기 시작한 첫째 이유는 건강하고 싶어서였다. 지금 이 시각에도 말 못 할 고통 속에 죽임 당하는 동물들과 지구까지 함께 튼튼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자문의였던 존 맥두걸(John A. Macdougall, MD) 박사가 쓴 <어느 채식 의사의 고백>이라는 책에 따르면, 영양학적으로 말해 유제품은 소나 양의 고기와 유사하다. 차이점은 육류를 많이 먹는 것이 더 건강에 나쁘다는 사실뿐. 고기와 유제품에 다량 함유된 단백질은 인체의 뼈에 있는 칼슘과 결합해 몸 밖으로 배출되고 이는 골다공증과 담석증, 골절로 이어진다. 또한 과잉 지방과 콜레스테롤은 혈관을 막히게 하고 암의 위험을 증가시킨다. 2011년 미국 심장협회는 이렇게 발표했다.


식사에서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굳이 동물성 식품을 먹을 필요가 없다. 식물성 단백질만으로도 필수 아미노산 및 비필수 아미노산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다.
통곡물, 콩과 식물, 채소, 씨앗 및 각종 견과류 등은 모두 필수 아미노산 및 비필수 아미노산을 모두 가지고 있다. 또한 식사할 때 이 음식들을(단백질을 상호 보완하기 위하여) 혼합할 필요도 없다.


오직 식물성 음식만으로도 단백질과 아미노산, 필수 지방, 비타민, 미네랄이 충분히 공급된다는 얘기다.


인간의 장은 육식동물보다 훨씬 길고 위액의 산성이 약해 고기가 들어가면 오래 머물고 부패해 혈전이 생긴다. 채식만으로는 혈관이 막히지 않으며 소화 역시 훨씬 빠르다. 비건 베이킹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묵직하고 더부룩했던 속이 편하고 가든해지면서 생활이 달라졌다. 다채로운 재료들을 만지고 사용하면서 음식을 한층 조심스럽고 깊게 음미하게 된 것도 수확이었다.

물론 비건을 표방한다고 해서 모두 윤리적이거나 몸에 좋은 것은 아니다. 콩고기, 비건 치즈를 포함해 시판되는 각종 비건 가공식품과 공산품의 원료를 보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는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유전자 변형 농수산물)와 화학물질들을 발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인증을 받았다거나 소비자를 무장해제시키는 문구와 이미지에 현혹되지 말고, 전체 성분을 꼼꼼히 보며 숨은 원료들도 잘 확인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비건이 일반적이지가 않아 사회생활을 하면서 완전 채식을 실천하려면 들을 말도, 감내할 일도 많다. 처음부터 완벽한 비건이 되려고 무리하기보다는 유연하고 장기적인 호흡을 가지라고 권하고 싶다. 비건 입문, 오늘은 비건, 간헐적 비건, 사회적 비건, 필요할 때만 비건이면 어떤가?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할 수 있는 만큼 하자. 마치 사람마다 다르고, 그 날 그 날마다 다른 몸 상태에 맞추어 스트레칭을 하듯이.


아직은 비건이라는 낯선 단어가 손님들의 일상조금씩 스며들 수 있도록, 매장에 비건뿐만 아니라 락토 오보 베지테리언(유제품이나 달걀을 섭취하는 채식) 메뉴를 함께 준비하고 있다. 버터가 들어간 빵을 주문하면서 비건 메뉴도 하나 시켜보았는데 맛이 없을 거라는 편견이 깨져 놀라는 분들을 볼 때만큼 보람 있는 순간도 드물다. 그 손님이 다음에 비건 메뉴만 주문하거나, 일행과 따로 와서 비건식을 드시면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비건은 느슨하지만 활기찬 연대다. 비건 손님들과 SNS 이웃들을 보면 내적 에너지가 충만하고 주도적인 인생을 사는 모습이 많은데, 생색이나 훈계로 자기 생각을 강요하거나 지나친 요구를 하는 사람은 드물다. 순간의 쾌락과 편의를 위한 착취 대신 스스로의 격을 높이는 자발적 절제와 불편을 선택한 사람들은 서로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유행처럼 불기 시작한 비건이라는 바람을 새로운 문화 현상으로 인식하고 체험해보는 것도 괜찮. 하지만 모든 존재의 안녕을 위한 작은 횃불을 들불처럼 키워 활활 태우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불어오는 더 큰 바람을 기대한다.

이제 힘을 빼고 공기처럼 가볍게, 바람에 올라타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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