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만 살짝 볼래?"
달콤하고 진한 향기를 내뿜는 액체가 천천히 혀를 지나 목구멍으로 꼴깍 넘어간다. 엄마가 집에서 직접 담근 포도주를 마신 날이었다. 커팅된 문양들이 화려하게 음각된 크리스털 병에 담긴 오묘하고 복합적인 맛의 음료. 어릴 때여서 조금 마셨지만 마술처럼 기분이 좋아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더 마시면 참 좋을 텐데... 끙.
성인이 되어 좋은 점들 중 하나는 맥주와 막걸리, 와인 등을 직접 구해 마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낯선 술을 경험하고 조금씩 마시기를 좋아해서 술에 대한 책과 교양 강좌도 찾아다녔다. 처음에는 대형마트에서 'Bordeaux 보르도'나 'Cabernet Sauvignon 까베르네 소비뇽'처럼 눈에 익은 단어가 보이는 와인을 골라 마셨던 것 같다. 그러다 점점 낯선 용어가 쓰인 와인들을 골라 마시면서 놀라운 성공과 예상 외의 실패(?)도 겪었다. 부족한 경험에서 비롯된 편견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Brachetto d'Aqui 브라케토 다뀌'나 'Cuvee 뀌베'라고 쓰인 와인은 대부분 맛있더라는 믿음 같은 것이었다. 당연히도, 그런 단어들이 와인의 품질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힘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짬짬이 파인 다이닝을 찾아다니던 20대의 내게 와인은 비교적 부담 없는 미식이었다. 홍대에서 마신 피노누아의, 꽃잎처럼 부드러운 향과 매끈한 질감은 나를 구름 위로 두둥실 던져 올렸고 학교 근처 와인바에서 마신 포트 와인은 나를 끝없는 어둠의 심연 속으로 내동댕이치기도 했다.
디저트 비스트로를 오픈하자 좋아하는 와인을 훨씬 다양하게 접할 기회가 열렸다. 먼저 같은 자리에 있던, 이전 매장이 거래하던 종합주류업체에 연락해 와인 목록을 받았다. 매장 운영은 처음이다 보니 가격이 높은 와인보다는 할인하는 제품 위주로 주문해보았다. 받고 보니 의외로 만족스러운 와인이 있는가 하면, 1+1박스로 24병을 받았는데 심각하게 맛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각 업장과 수입사들 가운데서 이윤을 추구하는 주류도매업체가 편리하긴 해도, 수입사에 직접 연락해서 와인에 대해 묻고 구입해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수입사에서는 시음주를 제공하기도 했지만 수요를 모르는 상태에서 대량 구매를 하기는 어려워 애매했다. 그보다는 매장이 한가한 2-4시경이나 주말을 이용해서 수입사 측이 여는 시음회에 참석하는 쪽이 마음 편했다. 궁금한 와인을 마시며 그에 대한 설명도 바로 듣고 기호에 맞는 와인을 찾을 수 있는 자리였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시음회에서 주는 와인을 모두 마신 채 알딸딸해져서 돌아오다가, 나중에는 와인의 향과 맛만 음미하고 뱉어내는 요령도 생겼다.
30~40곳의 와인 수입사에 연락하다 보니 나중에는 발품을 팔지 않아도 신뢰하고 주문하는 거래처들이 생겼다. 와인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주는 전문 인력이 있고, 1-2병씩만 주문해 마실 수 있는 곳들이었다(대개 동일한 와인을 12병, 최소 6병은 주문하는 것이 업계의 관례다). 처음에는 매일, 나중에는 일주일에 두세 병씩 새로운 와인을 음미하고 공부했다. 매장에서 혼술을 자주 하고 무겁지 않은 음식을 내다 보니, 진하고 묵직한 것보다는 미디엄, 라이트 바디의 레드 와인과 발랄한 화이트 와인의 매력에도 눈뜨게 되었다. 그렇게 직접 마시고 추려낸 매장의 와인 리스트는 현재 40여 종. 여기에는 내추럴 와인 10종과 비건 와인 14종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내추럴 와인, 비건 와인이 뭐냐고?
내추럴 와인 Natural Wine의 정의는 아직 국제적으로 합의되지 않았지만 최소한 유기농법을 사용하는 포도밭에서, 포도에 소량의 아황산염 외에는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고 생산한 와인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숫제 아황산염조차 넣지 않는 생산자도 있다. 한편으로는 엄격한 지역별, 품종별 와인 생산에 대한 규제에 반대하며 자유롭고 혁신적인 양조를 시도하는 와인이기도 하다. 사실 오늘날 판매되는 대부분의 와인에는 포도와 아황산염 외에 화학 효모와 효소, 색소 등 다양한 첨가물이 사용되고 있다. 포도를 따서 발효시킨다고 하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포도밭과 저장고, 병 속에서 시간적 균형을 잡으며 순수한 와인을 만들기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라벨에서부터 생산자의 개성이 느껴지는 내추럴 와인들. 뿌옇거나 침전물이 떠다니는 경우도 많다.
비건 와인 Vegan Wine은 내추럴 와인과는 다른 개념이다. 마치 채식과 자연식이 다른 것과 같다. 비건 와인은 내추럴 와인과 함께 대표되는 유기농 와인 중 하나로 동물성 원료와의 접촉을 차단한 와인을 의미한다. 와인에 무슨 동물성 원료가 들어가는걸까?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포도즙의 찌꺼기와 불순물을 거르기 위한 여과(filtering)및 청징(fining) 과정을 거치는데 이런 과정에는 전통적으로 달걀흰자나 카제인, 젤라틴 등의 동물성 물질이 사용된다. 비건 와인은 이런 물질 대신 종이 필터 또는 벤토나이트를 사용하거나, 시간이 걸려도 찌꺼기를 자연스럽게 침전시켜 와인만 떠내는 방식을 쓴다. 포도를 재배할 때도 물론 동물성 비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와인, 즉 컨벤셔널 와인과 비건 와인의 맛은 언뜻 느끼기에 현격한 차이가 나지 않지만 내추럴 와인은 개성이 확실해 기존의 와인에 없던 의외의 맛이 나는 경우가 많다. 병을 따자마자 쿰쿰한 효모 향이나 두엄 냄새가 나는 것도 있고, 톡 쏘거나 시큼한 향을 풍기는 것도 있다. 필터링 자체가 생략되는 경우가 많기에 침전물도 많은데 이런 침전물을 잘 섞어서 마셔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갈수록 유행하는 맛으로 수렴해 비슷해지는 기존의 와인에 식상해진 소비자들은 내추럴 와인의 예측 불가한 맛과 순수성에 열광한다. 하지만 컨벤셔널 와인과 유사한 느낌의 내추럴 와인도 있으니 지레 겁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와인을 마시는 행위는 미지와의 조우, 혹은 짧은 여행과 마찬가지니까.
누구도 세상의 모든 와인을 접할 수 없고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양조 기술의 발달로 원하는 맛을 세밀하게 조각하는 수준에 이른 지금, 와인의 빈티지 또한 따질 가치가 있는 몇몇 종류를 제외하고는 예전만큼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저 마음이 가는 와인을 골라 따고, 마시면 충분하다. 남은 와인은 뱅쇼나 상그리아를 만들어도 좋고 클레오파트라처럼 피부에 양보해도 좋을 일이다. 와인은 건강에도 유익한데, 환자들에게 와인을 처방한 것으로도 유명한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알맞은 시간에 적당한 양의 와인을 마시면 인류의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은 단지 그 사람의 취향을 말해준다. 잘 알려진 와인 정보 앱에서 생각보다 점수가 낮아도 내 입에는 잘 맞는 와인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사람들의 평가나 유행에 의지하기보다는 마시고 싶은 와인을 선입견 없이 골라 마실 때 비로소 와인과 온전히 만나 교감할 수 있다.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무의식적으로 설명부터 읽고 작품을 보기보다는, 작품을 먼저 감상할 때 숨은 영감과 호기심이 깨어나는 것처럼.
같은 시기에 병입한 와인도 여는 시점과 환경에 따라 맛이 다르다. 그때마다의 상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그시 관찰하는 것도 와인을 마시는 고유한 즐거움이다. 김치나 자장면처럼 생각지 못한 음식과 어울리는 조합들을 찾는 재미는 또 어떤가.
지나간 어제와 오지 않은 내일을 고민할 시간에 지금의 행복을 만끽하겠다면, 모셔둔 와인을 꺼낼 시간이다. 잘 모르고 아깝다는 핑계로 와인 마시기를 미루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