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아침이면 눈꺼풀이 저절로 스르르 열리고,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조그만 꽃봉오리들도 솜털이 보송한가 싶더니 터질 듯이 통통해졌다. 온몸으로 햇볕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있음을 느끼는 짧은 시기. 바깥에서 걷고 싶은 날씨다보니 손님이 주춤한 날도 있다. 철이 바뀌면 옷장에 걸린 옷들과 침구를 바꾸듯 나도 매장 안을 둘러보며 괜스레 사부작거린다.
베이킹 부스의 먼지를 뽀독뽀독 닦아내면서 유리 너머 탁자와 의자들을 관찰한다. 오픈 전부터 있던 것들은 배치와 용도를 몇 번 바꾸었다. 주문을 받는 계산대와 주방은 초기처럼 좁게 짜인 그대로다. 매장 안쪽에 필요 이상으로 넓게 자리한 화장실도 마찬가지. 처음에는 누가 이렇게 비효율적인 판매대와 주방, 화장실을 만들었을까 싶었지만 불편한 점들은 언젠가부터 다른 가게에 없는 특징과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쟁반은커녕 빵 몇 개도 올려놓을 수 없는 계산대 덕분에 모든 음료와 음식을 앉은자리로 직접 가져다 드린다. 다 드시면 반납하지 말고 자리에 놓고 가시라고도 안내한다. 진동벨을 쓰는 대신 왔다 갔다 하니, 바쁠 때는 손이 부족해도 손님들과 조금 더 친해질 수 잇다. 건강한 음식이라는 테마와 어울리기도 하고.
한 칸이지만 넉넉한 크기의 화장실은 '성중립 화장실'(모든 사람이 성별, 장애, 동반자 유무 등에 따른 차별 없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 표시로 변화를 주었다. 성중립 화장실은 거창한 개념이 아니다. 우리가 집에서 사용하는 화장실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편하게, 자기답게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하나의 화장실을 여성용과 남성용으로 나누는 공사를 하거나 면적을 줄여 테이블 놓을 공간을 더 확보하는 대신 공간 내의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의미를 담고 싶었다. 낯선 표시를 본 손님들은 기존의 화장실과 다른 점을 생각해보기도 하고, 평소보다 신경 써서 청결하게 이용하기도 한다.
티캔 뚜껑에 직접 그려서 문에 붙인, 성중립화장실 표시.
움직이기 편해야 할 주방은 길고 좁게 설계되어 매장에서 가장 불편한 장소다. 오픈 초기에는 화구에 위층 보일러 배관의 녹물이 뚝뚝 떨어졌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하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 몸에 닿지 않기가 어려운 공간이라 바쁘면 음료를 건드려서 쏟거나 머리 또는 다리를 부딪히기도. 대신 24시간 함께하는 남편과 다툰 날에도 주방에서만큼은 서로 등을 쓸며 다닌다는 장점이 있다. 기분이 좋을 때면 서로 엉덩이를 슬쩍 만지고 도망가기도 하는데, 손은 자주 씻고 있으니 염려 마시길.
불편함은 일상 속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집에서 시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나는 문밖을 나서고 들어올 때 약간의 보고(?)가 필요하다. 욕실은 사용할 차례를 기다려야 하고, 나름의 규칙이 있는 주방과 다용도실의 질서를 파괴하며 맘대로 설거지를 하거나 세탁기를 돌리기도 어렵다. 남편과 방에서 소리 내어 다투거나 신나게 웃고 떠들 수도 없다. 어머님이 자애로우신 것과 별개로 서로 양보하고 인정해야 할 영역은 끊임없이 생긴다. 때문에 합리성과 효율을 주장하거나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무심하게, 수용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기존에 쌓은 스스로에 대한 무의식, 에고 ego를 없애는 연습을 하기에 이보다 좋은 환경은 없을 것같다.
참! 우리 집에는 아기가 산다. 복지기관에서 입양을 보내기까지 봉사자에게 위탁하는 아기들을 어머님께서 먹이고 씻기며 보호하는 일을 십수년간 하고 계신다. 혜린, 다민, 지혜, 꽃하얀, 빛가람, 우현 그리고 지금 있는 재욱이까지 내가 겪은 아가만 벌써 일곱! 갓난아기로 온 녀석이 쑥쑥 자라 떠나면 다른 핏덩이가 온다. 아기가 울면 다함께 잠을 잘 수 없고 열이라도 나면 새벽에 응급실을 가며, 쉬고 싶은 주말에 아기와 놀아야 하니 힘들 때도 있다. 이유식과 간식 심부름이 귀찮기도. 하지만 매일 아기를 보는 어머님은 얼마나 고단하실까 생각하면.
아가들은 때로 우리를 마중하며 힘차게 돌진해 하루를 위로하고 사랑스럽게 뺨을 부빈다. 부정확한 발음으로 "느-나(누나)"를 외치며 조그만 주먹으로 방문을 꽝꽝 두드릴 때면 모든 근심이 사라진다. 아기들의 웃음 속에서 요정이 태어난다는 명작 <피터팬>의 구절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혼자 지내온 날들과 달리 늘 가족과 함께하는 생활이 한동안 눈물 나게 답답했지만 불편이 일상화되자 어느 순간 의식이 바뀌었다. 애초부터 나만의 소유물이나 공간은 없다는 깨달음 같은 것이다. 저 멀리, 아주아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남의 아이와 내 아이, 너의 공간과 나의 공간을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취향대로 꾸민 아늑하고 쾌적한 집이 생기면 편하고 자유로울 것 같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복작복작 부대끼고 불편하게 살던 지금이 그리울지도 모른다. 거실에서 놀던 아기가 응가를 하면 다 같이 씻길 준비를 하고, 누군가 아프면 약통을 뒤지다 편의점에 약을 사러 가고, 드라이브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옥상에 함께 올라 반짝이는 동네 야경을 감상하던 날들이.
옥상에서 바라보는 동네 야경.
지금도 서울 어딘가에는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인테리어의 매장이 또 생기겠지만, 숱한 불편을 겪으며 우리만 아는 가치들을 만들어낸 현재의 매장과 비교할 수는 없다. 손길 닿지 않은 곳 없는 구석구석의 불완전함은 매장과 초보 사장을 끈끈하게 묶어놓았다. 거미가 많아 수시로 탁자 위에 올라가 거미줄을 걷고, 불안정한 전기 공급으로 조명과 기기들의 부품 및 본체를 자주 교체한다. 그 까닭에 수리하시는 분들을 자주 만나고 누군가에게 작은 이익을 줄 수 있다. 쇼케이스와 제빙기는 어떻게 관리하고 하수도 배관은 어때야 하는지 등, 모든 것이 완벽했다면 몰랐을 사실들을 지금도 배운다.
틀로 찍어낸 듯 윤기 반드르르한 케이크보다는 구불거리며 이어지는 선이 어딘지 엉성한 케이크에 마음이 끌려본 사람은 안다. 바람에 흩날려온 민들레 꽃씨나 시시각각 변하는 저녁노을처럼,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는 자신을 구태여 꾸미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걸.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불완전한 흔적까지 숨김없이 드러내 보인다는 걸. 그건 혼란과 고통을 겪었다는 자랑스러운 성숙의 표식이므로.
지금의 상황이 불편하고 저항감이 드는 건 아직 만나고 겪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다는 신호는 아닐까. 감동이란 불편하고 불완전한 것들이 모여 하나의 완전함을 이룰 때 창조되는 것은 아닐까. 저마다의 개성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회사를 지탱하고, 별개로 떼어 놓으면 텅 빈 악기의 선율들이 서로를 조율하면서 관현악을 완성하듯이. 내 생각과 다른 것을 다름 그 자체로 바라보면 달라서 좋은 점도 분명히 보인다.
불편함이 쌓일수록 편안해지고, 불완전함이 충분히 모일수록 완전해진다. 우주의 무수한 존재들이 모두 저마다의 결핍과 과잉을 가지고 태어나는 데는 아마도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