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만찬과 토스트 한 조각
아끼는 요리 영화 두 편
요리에 관한 잘 알려진 영화 중, <바베트의 만찬(Babette’s Feast, 1987)>이라는 작품이 있다.
덴마크의 조그만 바닷가 마을. 목사의 딸로서 신앙과 봉사를 천직으로 여기며 사는 두 자매에게 바베트라는 여인이 찾아온다. 파리 코뮌*에 가담했다 남편과 아들을 잃고 도망쳐온 바베트는 두 사람을 따르며 12년을 무급 하녀로 묵묵히 일한다.
어느 날 일만 프랑의 복권에 당첨된 바베트. 그는 프랑스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각종 재료를 공수해 와서 두 자매와 마을 사람들을 위한 성대한 만찬을 준비한다.
* 파리 코뮌 Commune de Paris : 1871년 프로이센과의 굴욕적 강화조약에 반대하고 프랑스 시민들이 세운 노동자 중심의 자치 정부. 프로이센과 결탁한 정부군에 의해 3만 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금욕적이고 엄숙한 신앙 공동체 생활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불신과 불화가 뿌리 깊었던 마을 주민들. 그들은 메추라기, 거북이 등 처음 보는 식재료에 깜짝 놀라 음식에 대한 평은 하지 말자고 모의한다. 하지만 바베트의 출중한 요리 실력에 주민들은 하나 둘 입을 떼기 시작하고, 마을의 갈등과 미움들도 자연스럽게 녹아내린다.
<바베트의 만찬(Babette’s Feast, 1987)> 당첨된 상금과 온 영혼을 다해 차린 만찬이 끝나고, 이제 계속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자매의 말에 그는 답한다.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아요.
알고 보니 파리 유명 레스토랑의 수석 셰프였던 바베트. 정성을 다해 만든 음식에는 요리하는 이와 먹는 이의 욕망을 해소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있다.
이보다는 조금 덜 알려져 있지만 개인적으로 여운이 길었던 영화 <토스트(Toast, 2010)>는, 196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푸드 칼럼니스트인 나이젤 슬레이터의 추억과 성장통을 담았다.
나이젤의 엄마는 요리 실력이 형편없다. 거의 모든 식사는 통조림으로 해결하고 그나마 괜찮은 요리라고는 식빵을 바싹 구운 토스트뿐이다. 반면 나이젤은 어려서부터 요리를 갈망하는데,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병약했던 엄마가 죽고 아버지는 포터 부인을 가정부로 고용한다. 포터 부인의 농염한 매력과 빼어난 요리 실력에 금세 사로잡힌 아빠. 나이젤은 요리 실력을 키워 포터 부인을 견제하려 하지만 부인은 영 호락하지가 않다. 결국 포터 부인과 결혼한 아버지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고 비만해진 탓인지 점점 건강이 나빠져 사망하기에 이른다. 집을 떠난 나이젤은 꿈을 찾아 식당에 취직한다.
<토스트(Toast,2010)>누가 나쁜 일을 하더라도 당신에게 토스트를 만들어준다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한 입 베어 물어 바삭한 껍질을 지나
부드러운 반죽을 씹어 따뜻하고 짭짤한 버터맛을 보면,
당신은 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영화 속에는 호화롭기까지 한 레몬 머랭 파이를 비롯해 먹음직스럽고 유혹적인 음식들이 끊임없이 등장하지만, 사랑하는 엄마가 구워주던 따뜻하고 바삭한 토스트 한쪽이 나이젤에게는 '인생' 요리다.
지친 하루, 패잔병처럼 축 처진 어깨로 문을 열고 집에 들어왔을 때 식탁 위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쌀밥과 김치찌개 그리고 김 몇 장이 있다면.
외로운 타향살이를 하다 오랜만에 고향에 갔더니 엄마가 어릴 때 즐겨 먹던 반찬들을 한가득 꺼내어 주신다면.
애정을 듬뿍 담은 음식만큼 사람에게 희망과 행복을 주는 것이 있을까. 슬프게도 우리는 점점 더 요리하지 않는 시대에 산다. 간편식과 배달식은 지금 이 순간에도 무한 증식하며 일회용기에 포장된 채 빠르게 팔려나간다. 밥 한 그릇, 빵 한 조각이라도 직접 요리하고 챙겨주는 일들은 사라져 간다.
바쁘고 번거롭다는 핑계로 사 먹는 간편식, 업소용으로 나온 재료로 조리된 배달식을 먹고 나면 어쩐지 속이 거북하고 뒷맛이 개운하지 않았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요리하는 사람과 먹는 이의 영혼까지 맑게 하는 정성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름의 화합물과 먹는 이에 대한 무관심을 가득 넣은 자극적인 상품들. 각종 가공식품과 밀키트를 포괄하는 간편식들을 다르게 말하면 '대충 먹는 것'이 아닐까.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마음이 쓰인 음식은 소화도 잘 될뿐더러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기운을 북돋워준다.
매일 스스로와 가족이 먹는 음식을 만들어 판매한다. 내가 먹지 않거나 먹을 수 없다면 팔지 않기에 만약 덜 팔려도 남는 건 우리가 소비하면 된다. 공장처럼 싸게 대량 생산을 하기보다는 그 날 먹고 싶은 것을 조금씩 준비하고 국산과 친환경, 유기농 등의 재료를 써서 생생하고 순연한 맛의 음식을 만든다. 가족과 손님들의 몸에 좋을 거라는 생각에 비싼 원료를 써도 마음은 거늑하다.
한 끼를 적당히 때우는 상품이 아닌,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것 같은 울림이 있는 음식을 매일 조금씩 달리 내는 것이 매장을 운영하는 사명이자 목표이다. 그럼에도 최고의 요리는 홈메이드 스타일의 음식을 사서 먹는 것보다는, 서로를 위한 응원과 지지를 담아 손수 만든 그것이라고 믿는다.
요리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많다. 맛이 없으면?간이 맞지 않으면? 재료가 남고 주방도 어질러질 텐데 치우는 건 언제 다 하지?
분명한 것은 요리라는 행위 자체에 깃든 정화와 치유의 힘이다. 요리는 시작과 동시에 우리를 다른 길로 인도하며 잡념을 없애고, 어떤 식으로든 완성된 결과물을 남긴다. 미리 시험 보듯 전 과정을 계획할 필요는 없다. 이것저것 공들여해보고 싶은 전문 요리사가 아니라면 너무 긴 시간과 귀한 재료를 사용하는 것도 요리와 멀어지는 지름길이다.
프랑스 정통 요리학교를 다닐 때는 쉴 새 없이 손을 놀려도 하나의 요리를 만드는데 3-4시간이 걸렸다. 수료 후 집에서 그만큼 긴 시간과 고급 재료, 수많은 도구가 필요한 요리를 한 횟수는 손에 꼽는다. 요리의 원리와 기술을 베이킹과 일상에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긴 했지만.
예약해둔 파인 다이닝을 찾아가 최소 2시간씩 느릿하게 먹는 프렌치 코스와 1~2분이면 구워 먹을 수 있는 토스트 한 조각 중 어느 한 쪽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림처럼 예쁘고 세련된 음식을 오감을 동원해 분석하는 일은 비일상적인 쾌감을 주지만, 일상에서 음식의 역할은 사람의 허기를 달래고 활동력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짧은 시간과 낮은 비용으로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다면 훌륭한 음식이 아닐까.
잘하고 못 하기보다는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중요한 일들이 있는 것 같다. 상냥한 말 한마디와 부드러운 손길, 다정한 눈 맞춤, 위로의 침묵처럼. 내가 만든 음식을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일은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원시적이며 감각적인 방법이다.
'사람'과 '사랑'이라는 단어가 닮은 것은 사람이 사랑을 통해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까닭이 아닐까. 자신의 모든 것을 줄 수 있어 행복한 사람에게 별로 가진 것도 없으면서,라고 쉽게 코웃음 쳐서는 안 된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모두 예술가이며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