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안녕하세요

짧지만 다정한 그 한마디

by Yujin

사랑과 낭만의 도시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혼자만의 새해를 맞겠다며 꿈에서도 거닐던 곳.

파리에 드디어 도착했다. 찬란한 이십 대 중반의 마지막 생일이 갓 지난, 한 해의 끝무렵이었다.


12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파리의 지하철, 메트로는 땅속으로 한참을 걸어서 내려가는 구조다. 역을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운동이었고 우리네 지하철보다 훨씬 지저분하기도 했다. 처음 맞닥뜨린 키오스크는 영어를 지원하지 않아 어느 버튼을 누를지 막막했다.

한참만에 발견한 매표소로 다가가 젊은 직원에게 서툰 프랑스어로 말했다.

"티켓 한 장 부탁드려요."

그러자 그가 나를 흘끗 보더니 무어라고 쌀쌀맞게 내뱉었다. 알아듣지 못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다시 영어로 크게 소리쳤다.

"You have to say 'hello'!('안녕하세요' 먼저 말해야죠!)"


찬물을 덮어쓴 듯 당황해서 굳어버린 동양인을 한참 쏘아보다가 표를 내어주던 냉랭한 눈빛과 손길. 나무람이나 부탁의 뉘앙스는 한 톨도 묻어있지 않은 새된 말투에서 내가 실례했음을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꾸중에 가까운 역무원의 반응을 이해하기까지, 창피함과 충격으로 정신이 얼얼했다.


타인에게 어떤 일을 부탁할 때면 소리내어 인사를 먼저 하기보다는 목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무엇 (해) 주세요.'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직원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을 상대하며 복합적인 일을 해결하는 존재라는 점을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까르네 Carnet라는 표를 받아 개찰구를 통과한 후에도 나의 영혼(?)은 오랫동안 매표소 앞에 서성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문에 걸어둔 나무 풍경이 달그락거리면서 부드러운 마찰음을 내면 입에서는 자동으로 인사가 나온다. 풍부한 표정과 감정을 실어서 더 높은 톤으로 인사를 돌려주시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못 들은 체 입을 꾹 닫고 눈길을 피하며 경계심 가득히 들어오는 손님도 있다.


일찍이 대혁명을 통해 자유와 평등, 박애를 부르짖은 프랑스와는 달리 외세에 시달리면서 주권과 생산성의 회복을 우선시했던 한국. 그래서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과 인사 주고받기를 어색해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대학교 친구인 JY는 언젠가 내게 말했다.


"너무 친절한 가게보다는 청담동처럼 직원들이 좀 시크한 곳이 좋더라. 약간 냉정한 게 서로 편하지 않아?"


지금은 영국 남자와 결혼해서 인형보다 깜찍한 딸아이를 낳고 런던에 살고 있는 그.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란 고국을 떠나 낯선 문화에 적응하며 새 삶을 꾸리기 바쁠텐데 여전히 같은 생각일지 궁금해진다.


매장을 하면서 무엇이 가장 어렵냐고들 묻는다. 베이킹이나 메뉴 개발은 가장 먼저 제외된다. 그건 즐거움이니까. 어떻게 마케팅을 하고 가게를 운영할까 하는 문제도 아니다. 마음이 통하는 소수의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길을 찾는 일은 차라리 쉬운 편에 속한다. 몇십 년 동안 집집마다 다른 문화,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손님들을 만나 매일 부대끼는 것에 비한다면.


오픈 후 한 달, 한 달이 지날수록 손님들에게 지친다는 생각과 함께 격한 감정들이 춤을 추었다. 들어서자마자 초점 없이 뚱한 표정으로 손님을 맞는 카페와 음식점의 직원들이 왜 그랬는지 진심 이해할 수 있었다. 똑같은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없는데, 이해의 간극을 빨리 메우고 미소 지어야 하는 쪽은 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우리였다. 눈을 내리깔고 주문하는 손님의 표정과 태도, 뜻 모를 질문과 말들이 쌓이면 실수일지 모를 사소한 자극만 더해져도 친절하자는 결심이 뚝 꺾였다.

뿌리부터 썩어가는 식물처럼 마음은 시들거렸고 신경과 근육이 이곳저곳 아프기 시작했다. 함께 일하는 남편과는 눈곱보다 작은 일로도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다투었다.


쉬는 날도 없던 첫 해에 갈 곳 없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면 한창 잘 나가던(?) 손님 시절, 다른 가게에서 저지른 만행들을 떠올려보는 것이 도움이 됐다. 누군가의 사적인 상업 공간을 일정 시간 점유하려면 그만한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둘이서 한 그릇의 음식 또는 한 잔의 음료를 주문한 채 시간을 보낸 일. 금방 갈 건데 어때, 나눠먹어야 더 맛있다며 합리화한 일. 카페의 휴지통에 집에서 가져왔거나 가방에 있던 쓰레기를 버리면서 미안해하지 않은 일. 그러려고 한 건 아니지만 공용 공간인 화장실을 막히게 한 일과 그 사실을 매장에 알려주지 않고 도망치듯 나온 일...

주의한다고는 했지만 돌이켜볼수록 나 역시 매장에서 싫어할 손님이었던 때가 적지 않았다. 왜 그랬나 싶은 일이 떠오르면 '벌 받는 거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났다.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참신하고 숱한 결례들을 범했을 가능성이 높겠지?배려심이 부족한 것과 이기적인 건 다르다는 걸, 매장을 열지 않았다면 언제쯤 알 수 있었을까.


2년 차부터는 휴일을 만들었고, 쉬는 날마다 스스로 '손님 놀이'라 부르는 의식을 갖는다. 가보고 싶은 매장을 찾아가 어떤 점이 좋고 어떤 점이 불편한지를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시간.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었어도 이런 과정 속에서 컨디션은 거짓말처럼 0 또는 + 로 돌아온다.


매장에서 상상 이상의 품위 넘치는 행동을 보여주신 손님들도 있다.

조용히 오셔서 음식을 맛있게 드시고, 남은 것은 항상 가져온 밀폐 용기에 담아 가시던 여자분.

저녁에 혼자 찾아와 느긋하게 식사나 디저트를 음미하시고 생일에 좋은 와인까지 가져와 챙겨주신 남자분.

항상 같은 파스타를 드시지만 그때마다 "맛있어요."라고 말씀해주시는 차분한 손님.

직접 맛보며 하나하나 골라 넣은 와인 리스트를 알아주시고 만족감을 표현해주신 와인 애호가.

귀찮지도 않으신지 일회용 봉투와 캐리어를 다시 챙겨 와서 아깝다며 돌려주시는 이웃들.

과자나 과일 등 맛있는 먹거리를 나눠주신 에너지 가득한 손님들.

처음에는 얄미웠지만 자주 보는 새 정이 들어버린 까다롭고 개성 넘치는 아저씨들과 할아버지들.



우주의 사물과 사람은 저마다의 가치가 있기에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일상에서 겪는 숱한 사건과 사람 사이에도 알고 보면 숨은 인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그게 무엇이고, 왜 일어나는지 당장은 모를 뿐.

우리가 지금 만나는 사람들에게 다정하게 인사해도 좋을 이유다.





이전 08화첫 1년 - 매장의 하루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