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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Jun 28. 2024

[읽은 책 기록] 2024년 6월

1. 페미니즘의 도전 / 정희진

2. 글쓰기의 최전선/ 은유

3. 필경사 바틀비 / 허먼 멜빌 단편선. 박경서 옮김

4. 낭독 독서법 / 진가록

5. 마음 사전 / 김소연

6. 단어의 집 / 안희연



1. 페미니즘의 도전


- '섹스'는 뇌로 하는 것이지 성기로 하는 것이 아니다. 발기는 혈액이 조직을 채우는 것인데, 이는 뇌의 역할이고 그 기능을 가능케 하는 '자극'의 내용은 철저히 사회적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 화학적 거세'는 과학적 근거도 없고 실제 효과도 없다.


- '양성 평등'은 인간이 두 가지 성으로 구성되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러한 인식 체계는 여성도 남성도 아닌 양성구유자로 태어나는 사람의 존재를 비가시화하고, 양성의 경계를 문제화하는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같은 성적 소수자를 '제3의 성'으로 전락시킨다. '여성의 사회 진출'? 그렇다면, 여성이 생활했던 가정은 사회가 아닌가? 가정과 사회를 상호 배타적인 공간으로 상정하는 이러한 논리 때문에 가정에서 여성이 폭력을 당해도 '사회의 질서'인 인권이나 민주주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 가장 자극적인 소재는 바로 이 권력 단계의 극단화를 의미한다. 일반 포르노 화면에서 남성의 사회적 지위가 더 높은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남자, 여자라는 성별 권력 차이 그 자체가 주요 쾌락 코드이다.


- 미혼부라는 말은 없다.


-  '연상의 여인'이라는 말은 있지만, '연상의 남성'이라는 말은 없다.


- 아줌마는 여성이 아니라 제3의 성이다. 공적 영역에 나올 수 있는 여성은 남성이 규정한 여성 이미지 - 젊고 예쁜, 자신의 눈을 즐겁게 할 수 있는 - 에 걸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줌마는 그들이 기대하는 여성이 아니다. 아줌마에 대한 혐오와 어머니에 대한 신성화라는 이 아슬아슬한 게임에는 경계가 없다. 남성들이 논하는 아줌마/어머니의 존재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대단히 고도의 정치적 목적을 가진 픽션이며, 따라서 예측할 수 없는 임의적인 이데올로기다. 아들이 필요로 하는 변화무쌍하며 한없는 요구의 대상. 이것이 어머니론의 핵심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는 변화하지 않아야 한다. 아들의 입장에서 어머니는 자기 요구대로 변화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변화해서는 안 된다.


- 여성이 자궁이 있기 때문에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면 성대가 있는 사람은 모두 오페라 가수가 되어야 하는가?


-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 운동가가 아닌, 즉 정치학이 없는 전문가는 의미가 없으며, 운동가는 이미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 의미는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하며, 인식은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 여성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서구/남성의 대립항으로서 '우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는 것이다. 여성주의는 서구/'우리', 남성/여성이라는 이분법 자체가 서구/남성의 권력이라고 보는 대표적인 탈식민주의 사상이다.


- 앎은 경계와의 만남에서 가능하다.


- 사랑보다 더 진한 배움(intensive learning)을 주는 것이 삶에 또 있을까. 사랑받는 사람은 배우지 않기 때문에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다. 사랑은 대상으로부터 유래-발생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내부의 힘이다. 사랑하는 것은 자기 확신, 자기 희열이며, 사랑을 갖고자 하는 권력 의지다. 그래서 사랑 이후에 겪는 고통은 사랑할 때 행복의 일부인 것이다.


- 우리는 사랑받을 때보다 사랑할 때, 더 행복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사랑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크기, 깊이를 깨닫는다. 


- 페미니즘을 남녀에 관한 이슈에 국한하지 않고 삼라만상(인식의 모든 대상)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 접근방식, 논의 방식이라는 인식의 방법으로 이해한다면, 자신과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다.


- 인간은 누구나 소수자이며,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골'일 수는 없다.


-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 속에서 자신을 당연한 주류 혹은 주변으로 동일시하지 말고, 자기 내부의 타자성을 찾아내고 소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회운동은 부분 운동이다. 




2. 글쓰기의 최전선  / 은유


- 막힌 삶을 글로 뚫으려고 애썼다.


-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이 견딜 만한 고통이 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일임을. 혼란스러운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지, 덮어두거나 제거하는 일이 아님을 말이다.


- 나만의 언어 발명하기. 이것이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까닭이다. 모든 경험은 언어에 의해 규정된다. (중략) 쓸 때라야 나로 살 수 있었다. 산다는 것은 언어를 갖는 일이며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기억했다.


- 우리가 충분히 배우고 우리의 눈과 귀를 충분히 연 경우 언제든 우리의 영혼은 더욱 유연하고 우아하게 된다. 


- 인간은 아는 만큼 덜 예속된다.


- 일단 내 앞에 있는 조잡한 도구로 시작하라. 망치로 삽을 만들면 삽으로 사과나무를 심고 사과 열매를 팔면 책을 살 수 있다. 시작을 해야 능력의 확장이 일어난다.


-  혼자 쓰고 혼자 읽고 혼자 덮는 것은 일기다. 글쓰기가 아니다. 비밀이 사람에게라도 발언할 생겨나는 것이듯 글쓰기라는 것에는 어차피 '공적' 글쓰기라는 괄호가 있다. 


- 선악구도를 넘어서는 지점을 찾아보려는 노력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싹튼다. 그게 어렵지만 먼저 느낀 대로 말하고 쓰고, 그 생각을 공적인 장에 내놓아 외부에서 검증받고 소토하면서 어떤 사건에 대한 해석을 바꾸어가는 것. 그러니까 다른 (생각을 가진) 내가 되어가는 과정의 기록이 글쓰기의 본령이다.


- 삶에 관대해질 것, 상황에 솔직해질 것, 묘사에 구체적일 것.


- 남들이 당신을 설명하도록 내버려두지 마라.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또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를 남들이 말하게 하지 마라. - 마사 킨더 -


- 약자는 달리 약자가 아니다. 자기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할 때 누구나 약자다. 노동자의 심정을 자본가가, 장애인의 입장을 비장애인이, 동성애자의 아픔을 이성애자가 대신 말할 수 없고, 말한다고 해도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고착시킬 뿐이다.


- 책은 읽는 것이 아니다. 행각에 머무르고 거주하는 것이다. - 발터 벤야민


- 누군가 내게 물었다. 시를 쓰는 힘은 도대체 어떤 거냐고. 나는 대답했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 힘이라고. 이 세계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이 세계에서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꽤 괜찮은 일이 시를 쓰는 일이라고. - 김소연


- 나에게 시인은, 인간의 위엄을 지키는 보증인이다.


- 대량생산 대량소비는 경제의 법칙이다. 문화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것의 발견, 감정의 세분화, 다름의 향유다. 모든 감각의 평준화를 양산하는 건 결코 좋은 문화가 아니다. 


- 첫 번째 판단을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네 몸을 통해 판단한 것이다. - 니체




3. 필경사 바틀비 / 허먼 멜빌 단편선. 박경서 옮김


- 그는 글을 반듯하고 빠르게 썼으며 또 필요한 경우 일종의 신사다운 행세를 하기도 했다. 게다가 옷도 항상 신사처럼 입고 다녔는데, 우연인지 몰라도 아무튼 그 덕에 내 사무실의 평판이 올라갔다. 그에 비해 터키의 경우, 내가 욕이나 먹지 않을까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옷은 기름이 번질번질 배어 있고 싸구려 식당 냄새 같은 것을 풍겼다. 그리고 여름에는 늘어진 헐렁한 바지를 입었고, 외투는 혐오스러웠으며 또 모자는 손대기가 싫을 정도였다.


- 니퍼스의 이런 행동은 소화불량이라는 괴상한 원인 때문인데, 흥분에 이어 나타나는 신경과민증은 주로 오전에만 나타났고, 오후에는 비교적 잠잠해 내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그래서 터키의 발작은 12시쯤 일어나기 때문에 나는 이 두 사람의 괴상한 행동을 동시에 겪지 않았다. 그들의 발작은 보초들이 서로 교대하듯이 번갈아 있어났다. 니퍼스의 발작이 일어나면 터키는 잠잠했고, 터키가 발작하면 니퍼스는 조용했다. 이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볼 때 자연의 오묘한 조화였다.


- "왜 거절하는 거지?"

"안 하는 편이 더 좋겠습니다."

다른 녀석이었더라면 나는 분노에 휩싸였을 테고 그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든 내 면전에서 그를 굴욕스럽게 쫓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바틀비에게는 이상하리만큼 내 분노를 가라앉힐 뿐 아니라 놀라운 방법으로 내 마음을 움직여 혼란스럽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었다. 


- 그는 여전히 내 사무실의 붙박이 세간처럼 남아 있었다. 아니(그게 가능하다면)전보다 더한 붙박이가 되어 있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하지? 그는 내 사무실에서 하는 일이라곤 없어. 그런데 왜 이곳에 붙어 있으려고 하는 거지? 분명히 그는 이제 나에게 정말로 골치 아픈 존재가 되어 버렸다. 목걸이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짊어지고 다니기에도 괴로운 '목에 걸린 맷돌'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 나는 벽 밑에서 이상하게 몸을 웅크려 두 무릎은 세우고, 싸늘한 돌에 머리를 대고 옆으로 누워 있는 초췌한 바틀비를 보았다. 그러나 몸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주춤했고, 다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들여다보니 그의 흐릿한 두 눈은 뜨여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더라면 깊이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의 몸에 손을 대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의 손을 만지자 오싹한 전율이 내 팔을 타고 올라와 척추를 타고 발끝까지 내려갔다. 


- 풍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배달할 수 없는 죽은 편지들! 죽은 사람들이라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선천적으로 혹은 불운 때문에 무력한 절망에 빠지기 쉬운 인간을 상상해 보자. 이 죽은 편지들을 쉴새 없이 분류해서 불태워 버리는 직업만큼 그 절망을 더 깊에 만드는 직업이 또 있겠는가? (중략) 생명의 심부름을 하는 이런 편지들은 죽음으로 치닫고 있다.

아, 바틀비여! 아, 인류여!




4. 낭독 독서법 / 진가록


- 낭독은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고, 나에게 스스로 선포하게 만드는 독서법이다. 


- 공부는 푹 익은 데서 나오는 것이다.


- 뇌는 어떤 스트레스나 압박감을 심하게 느끼게 되면, 감정의 충격을 줄 수 있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떠오르게 만든다.


- 암송을 제대로 하려면 발성기관을 활발하게 움직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오장육부 중에서도 특히 신장에서 기운을 끌어올려야 한다. <<동의보감>>에도 나와있듯이, 신장이 소리를 주관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암송을 규칙적으로 하다 보면 신장의 기운이 튼실해진다.


- 굶주린 때에 책을 읽으면 소리가 배나 낭랑하여 그 이치와 취지를 잘 맛보게 되어서 배고픔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 '글쓰기의 최고봉은 시'라는 말이 있듯이, 은유를 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이고 재능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에 능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사물들의 유사성을 재빨리 간파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5. 마음 사전 / 김소연


- 밥은 사람의 육체에게 주는 음식이라면, 차는 사람의 마음에게 주는 음식이다. 그릇이 육체에게 에너지를 준다면 잔은 마음에게 에너지를 준다.


- 냉정함이 열정의 한 방법이듯이, 냉정해지는 것에도 온기 있던 한때가 전제된다.


- 태양열이 유리벽을 한번 뚫고 들어오면 다시 나가지 않고 덫에 걸린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온실이 발명됐다. 그런 온실이 나에게도 있다. 이미 서로 마음의 유리벽을 꿰뚫고 직진해서 서로에게 들어간 후, 이별이 진행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별이 아니다. 서로의 올가미 속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을 뿐. 당신은 이미 빠져나가고 없지만 당신이 이미 들어왔던 여기에서 나는 따뜻하다.


- 감정이 한 칸의 방이라면, 기분은 한 채의 집이며, 느낌은 한 도시 전체라 할 수 있다. 감정은 반응하며, 기분은 그 반응들을 결합하며, 느낌은 그 기분들을 부감한다.


- 소중한 존재는 그 자체가 궁극이지만, 중요한 존재는 궁극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이다. 돈은 전혀 소중하지 않은 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여 있다. 너무 중요한 나머지 소중하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 처참함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정황이라면, 처절함은 차마 손 댈 수 없는 정황이며, 처연함은 눈뜨고 볼 수도 있고, 손을 댈 수도 있지만, 눈길도 손길도 효력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는 상태다. 처참함은 입맛을 잃어 물조차 삼킬 수 없는 지경이라면, 처절함은 밥솥을 옆구리에 끼고 전투적으로 숟가락질을 하게 만드는 지경이며, 처연함은 한 그릇 밥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경지이다.  누군가가 우리를 처참하게 했을 때, 우리는 행동할 게 없어지고 말이 쌓인다. 하지만, 누군가 우리를 처절하게 했을 때, 우리는 말이 없어지고 대신 처신할 것만 오롯이 남는다. 그 누구 때문에 우리가 처연해진다면, 그때는 말도 필요 없고 행동도 필요치 않은 상황이다. 


- 은은한 사람은 과정을 아름답게 엮어가며, 은근한 사람은 결론을 아름답게 맺는다.


-  슬픔은 모든 눈물의 속옷과도 같다. 무슨 연유로 울든 간에, 그 가장 안쪽에는 속옷과도 같은 슬픔이 배어 있다.


- 대상과 나 이외의 것들은 안중에 없는 상태가 바로 청춘이다. 




6. 단어의 집 / 안희연


- 나무늘보는 하루 10시간 정도 잠을 자고 대부분의 시간을 '가만히' 있는다고 한다. 이 '가만히' '꼼짝 않고' 있는 모습이 마치 잠을 자는 것으로 오인된 것이다.


- 코알라에게는 코알라의 잔이 있고, 나무늘보에게는 나무늘보의 잔이 있고, 나에게는 나에게 어울리는 잔이 있다는 것. 그것이 운명의 한계로 오인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잔의 외형이나 크기로 인해 차별당하거나 파괴당하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의 규모를 존중하면서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 시는 내가 아는 가장 간결한 형태의 다반이다. 말과 침묵이 비등한 무게를 지닐 때가 많고 때로는 침묵이 말보다 더 큰 무게를 가질 때도 있다. 글을 퇴고할 때도 무언가를 자꾸 덧붙이려는 나를 가장 경계하곤 한다. 그건 불안이니까. 사족이니까.


- 한 알의 주악 같은 문장이 시에 있었는가. 손안에 든 심장처럼 뜨겁고 흘러내리고 쿵쾅거리는.


- 작은 달력을 선물받았는데 달이 바뀔 때마다 그냥 버려지는 게 아깝다면서 달력 뒷면에 편지를 써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 그는 "상을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비올라에 있어 위대한 날이에요"라고 말했는데 두 표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략) 위대하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나의 연주가 아니라, 이 모든 것에 앞서 존재하는 비올라의 위대함이라는 듯이. 


- 조도는 특정 면적에 직접 도달한 빛의 양을 일컫는데 반해 휘도는 그렇게 도달한 빛이 반사되어 우리 눈에 얼마나 들어오는지를 측정하는 개념이다. 결국 휘도는 필연적으로 한 번의 굴절을 거치는 셈이다.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라는 저 유명한 <카사블랑카>의 대사가 세기의 고백일 수 있었던 까닭을 생각해본다. 이 문장은 조도가 아니라 휘도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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