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00에 진심이었다.
법률 상담을 받으러 변호사사무실을 찾은 지 벌써 9개월째. 많은 서류를 준비하고, 마음 졸이며 힘든 나날을 지나왔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건...?
변호사였다.
처음 변호사 사무실을 고른 기준은 특별하지 않았다. 법원과 가까운 곳들의 네이버리뷰를 보다가, 공휴일 상담이 가능해서 일에 지장이 없는 곳을 선택!
한글날 찾아간 사무실에는 한 명, 또 한 명 사람이 계속 들어왔다. 변호사는 작은 키에 높은 톤의, 기계적이고 빠른 목소리의 소유자. 비슷한 또래로 보였는데 문의한 내용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비치며 더 알아보고 오라고 했다. 예상보다 비용은 높았지만 계약을 했고 이튿날부터 소송 준비가 시작됐다.
채팅방의 참여자는 총 4명. 사무실 직원 2명, 변호사 그리고 나였다. 처음 받은 서류 요청에는 이해되지 않는 서류도 포함되어 있어 맞는지 물었고, 원래 이렇게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해보자는 답이 온다.
법적인 의뢰는 그들과 달리 나로서는 난생 처음 겪는 일이지만, 궁금한 점을 물어보면 정확한 답 대신 무응답이나 다른 방법으로 하면 된다는 말이 돌아왔다. 나중에는 답을 피하기 곤란해서인지, 힘들고 번거로운 일을 추가금 없이 해주고 있다는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친절도 느껴지지 않는 건 그들의 일이 너무 많아서였을까? 카톡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 법이 없는 변호사는 항상 바빠 보였으니.
얼마 후 그와 크게 부딪히는 일이 생겼다. 대부분의 질문에 확답받지 못하고, 다른 방법으로 하자는 애매한 답을 꾸역꾸역 따랐음에도 ‘해달라고 부탁한 것도 안 해주셔서 일이 지체된다'는 그의 말이 아연해서였다. 내가 50%, 직원이 48%의 실질적인 일을 했다면 변호사는 상담 후 남는 시간에 대강의 상황을 보고 재촉하거나, 질문을 씹어먹고(?) 다른 화제로 돌리는 2%의 일을 한다고 생각되던 때였다.
전화를 걸었다.
"제가 어떤 서류를 안 보내드렸나요? 그 말씀은 취소하셔야 될 것 같은데요. 부탁한 걸 안 했다는 말은 변호사님이 잘못하신 것 같습니다."
사과를 요구하자 변호사는 잠시 후 잘못을 인정했지만, 기분이 상했는지 향후 채팅방에서 더욱 짧고 냉랭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 후 사무실에서 의논할 일이 생겨 방문한 어느날, 그는 직원들 앞에서 내게 공격적으로 외쳤다.
"고집 엄청 세죠? (남편과 눈을 맞추며) 그쵸, 고집 진짜 세죠?"
부정적 판단을 싣고 갑자기 훅 날아오는 말에 뺨이라도 맞은 듯 얼어붙었다.
"저도 성격 진짜 엄청 급하고 더러워요.“
(저'는' 이라고 하셔야 할 것 같은데…)
"근거를 가지고 말하세요. 저는 직원들한테도 책임질 수 있는 말만 하라고 해요."
(근거는 계속 제시했지만 듣지 않았잖아요. 그리고, 책임지지 않기 위해 확답을 피한 건가요?)
말도 잘 통하지 않는데 예상치 못한 폭언. 힘이 쭉 빠지며 체념이 온몸을 휘감았다. 살다보면 이렇게 서로 상극인 사람도 만나는구나.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렸고, 채팅방에 알람이 뜰 때마다 세포들에게 공격당하듯 컨디션이 가라앉았다. 정신건강을 위해 채팅방에서는 '네. 알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껏 해온 일들을 모두 취소할 수도, 다른 사무실에서 더 나은 변호사를 만난다는 보장도 없으니. 착수금의 대부분을 이미 지불했고 서류 작업도 끝나가는데 감정 소모를 해서 무엇하나.
7개월이 지나 법정 기일이 잡혔고 남은 착수금을 그때 지불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사무실에 굳이 오지 말고 비대면 결제를 하라고 한다. 얼굴도 보기 싫어서일까 아니면 하루라도 빨리 수금하고 싶어서? 5, 6, 7월에 하나씩 보내겠다던 비대면 결제 링크는 결국 오지 않았다.
법원에 가기 이틀 전, 결제 누락 이야기를 꺼내니 그는 '동명이인이 있어서'(잘못 보냈다)라며 말을 끊었다. 잘못 보냈으면 그 사람도 뭐라고 말을 했을 텐데 참 이상하지. 법원가는 날 사무실에서 결제하겠다고 하니 그는 다시 비대면결제를 요구했다. 힘들게 앱을 깔고 비대면 결제 완료. 모바일 영수증을 보내니 그가 갑자기 법원 오는 날 사무실에 "꼭" 들르라고 한다. 인감을 찾아가시고 설명할 것도 있다고.
'몇 번이나 올 필요 없다더니...'
다음날도 꼭 들르라며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그래도 거의 마지막이니 뭔가 도움 될 말을 해주려나 싶었다.
법원에 간 날. 남편과 나는 쏟아진 장대비에 흠뻑 젖었다. 사무실에 들러 인사하자 모르는 사람을 보듯 변호사가 이름을 묻는다. 우리를 상담실로 안내하는 태도가 평소보다는 약간 정중하다. 그는 법원에서 들은 이야기를 다시 요약해서 말하고, 관리 중인 블로그에도 다 있다며 보여주었다.
이것 때문에 굳이 불렀다고?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을 하라고 한다. 이제와서요? 질문할 땐 그렇게 정색하며 싫어하시더니…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야지 생각하는데, 그의 입에서 본론이 튀어나왔다.
"지금 저희가 이벤트를 하고 있는데, 영수증을 하나 발행해서 리뷰를 써주시면, 치킨 보내드리고 있거든요."
비건인 나는 치킨에 관심이 없고 그에게 도움이 될만한 리뷰를 써줄 생각도 없었다. 사무실을 처음 찾아갔을 때 리뷰를 참고했지만, 그 리뷰들에 대해 갈수록 의아하게 여기던 참이었다. 변호사 성격도 일처리도 경험해서 아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고마워한다고? 이 사람들 다 알바인가...? 의심했는데.
치킨이었구나!
순간 웃음이 났다.
리뷰에 직원을 칭찬해주시면 직원의 인사고과에 반영이 된다고 그는 덧붙였다. 참고로 직원 식대가 15000원인데 이 정도면 꽤 괜찮지 않냐는 TMI를 곁들이며. "그래서 여기 오시는 분들한테 뭘 사오지 마시라고 하는데(그럴 생각도 없어요...) 왜냐하면 직원들이 신나게 제 카드를 긁고 있거든요."
그간 변호사와 말을 섞고 마음이 복잡할 때면 간절히 기도했다. 신의 눈을 통해 그에게도 사랑을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그와 더는 감정의 앙금을 남기지 않겠다고. 그런데 눈앞에서 리뷰이벤트 이야기를 하며 치킨을 쏜다는 그를 보자 심각했던 스스로가 얼마나 허무하고 희극적으로 느껴지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떤 걸로 보내드릴까요? 제가 보니까 요즘 교촌도 많이 드시고, 그다음이 BHC…“
옆에 있던 남편도 조금씩 웃기 시작했다. 저돌적으로 리뷰 이벤트를 들이미는 그를 보며 이상하게도 묵은 감정이 샤워기를 댄 것처럼 씻겨내려간다. 진짜 재미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이익에 확실하구나. 그동안 내게 어떻게 하셨는데 리뷰를 써달라고 이렇게 쉽게 말씀하시지? 와, 이 뒤끝없는 악함. 실리와 물질적 추구의 순수함이여.
일이 완전히 종료된 건 아니어서 리뷰 부탁을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이따 쓴다며 100원짜리 영수증을 발급받아 차에 오르니 벌써 카톡으로 치킨+콜라 선물쿠폰이 와 있다. "축하해요!" 라는 메시지와 함께.
나는 자꾸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천천히 리뷰를 썼다. 변호사에게 감사하다고는 도저히 쓸 수 없어서, '직원분들께 참 감사하다'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생각했다. 리뷰의 힘은 진실로 위대하다고.
이제 그를 떠올리면 마음 편히 웃는다. 기도가 전해진걸까? 바라던대로 모든 앙금이 사라졌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