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마시는 시간
작은 종이배를 연상시키는 나의 반려 쾌객배. 나그네가 가지고 다니는 것처럼 빠르고 간편하게 차를 우려낼 수 있는 다구다.
뚜껑을 열어, 종이봉투에 담긴 보이생차를 소수점 저울을 써서 조금 덜어 넣고(정확한 계량은 베이커의 본능이므로) 뜨거운 물을 담아 한번 헹궈낸다.
다시 뜨거운 물을 담아 1분 정도 우린다.
연한 녹색을 띤 물을 두 개의 작은 잔에 나눠 따른다. 크기가 조금씩 다른 잔인데, 가끔은 더 작은 쪽을 남편에게 쓱 밀어 본다.
남편 : "싫어."
나: "왜? 오랜만에 한 잔 해."
남편 : "시원한 거야?"
나: "아니. 그럼 식었을 때 마셔."
남편 : "......" (다시 내게로 스윽 민다)
빵을 만드는 이른 아침에는 집중과 각성을 위해 커피를 들이키며 일한다. 무더위에 아랑곳없다는 듯 쉴 새 없이 도는 주방의 냉장고, 냉동고, 제빙기, 와인냉장고, 커피머신, 쇼케이스 그리고 두 대의 오븐이 뿜어내는 열기란. 그 안에서 빵을 반죽하고 성형하며 바쁘게 움직이려면, 잊지 않고 텀블러에 부지런히 얼음을 채워 넣어야 한다.
하지만 바쁜 한때가 지나고 손님들의 대화가 조금씩 귀에 들어오는 오후에는 차를 꺼낸다. 요즘 즐겨 마시는 차는 진피차, 보이생차, 율무차. 가끔은 뽕잎차나 녹차, 티백으로 된 유기농 현미녹차도 뺄 수 없지.
느긋이 차를 우리고 음미하며 내면의 자신을 대접하는 시간. 끊임없는 생산, 획득, 경쟁을 향해 나아가던 스스로를 부드럽고 단호한 의지로 멈추는 순간. 명상하기 위해 앉아서 눈을 감는 행위와 닮아 신선놀음이라고 할만큼 각별하다. 거듭 마실수록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화로워진다.
차는 웬만큼 마셔도 속에 부담이 없으면서도 (특히 나처럼 연하게 여러 번 마시는 경우) 정신을 맑게 해 준다. 쓴맛이나 신맛을 가진 식물이 대개 그러하듯이, 소진한 에너지를 채워주는 효과도 있다. 맛도 좋다. 게다가 0 칼로리.
기왕 두 잔으로 나눈 차를 내 안의 나, 나를 지켜보는 나와 함께 주거니 받거니 홀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