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과의 첫 만남
자신의 100%를 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와 만난 건 유난히 햇살이 따갑던 어느 날, 도시 농부와 푸드트럭 그리고 수제 먹거리 셀러들이 모인 마켓에서였다. 약 일주일 만에 서로를 평생의 짝으로 여긴 우리는 양가의 어색한 식사와 지중해 여행으로 결혼식을 대신했고, 그로부터 2년 남짓 베이킹 스튜디오와 푸드트럭을 동시에 운영했다. 그가 목공으로 손수 짠 트럭과 함께.
한창 푸드트럭 붐이 일던 시기여서 한강공원에서 열린 <서울밤도깨비야시장>은 각양각색의 트럭이 모인 축제로 주말마다 북적였다. 줄을 몇 바퀴 돌려 뒤편 멀리까지 세울 정도로 사람이 많아, 일이 끝나면 녹초였지만 짜릿한 날들이었다. 평일에는 여의도에 짧게 몇 시간 트럭을 열고 작업실로 돌아와 베이킹 연구를 하거나 수강생을 가르쳤다.
모든 수업에서 가장 많이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닐까? 베이킹 경력 5개월 만에 클래스를 오픈하고 실력은 빠르게 늘었다. 빵을 많이 만들어본 자부심은 없어도 먹어본 자긍심은 넘쳐서 일반적인 빵보다는 원하는 품목을 찾아 독학하는 것이 성미에 맞았다. 시중에 없는 다른 나라의 전통 빵도 직접 만들면 맛볼 수 있으니. 남다른 시각을 갖추기 위해 프랑스 요리학교 <르 꼬르동 블루 Le Cordon Bleu>의 기초 요리 과정도 이수했는데, 제과와 제빵 품목 또한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때로는 드라마나 영화 촬영 현장에 케이터링을 갔다. 배우와 감독, 바쁜 스텝들에게 수백 잔의 커피와 간식을 빠르게 제공하느라 수명이 단축되는 기분이었지만 금전적으로 여유로운 시기였다. 시간이 흐르자 여러 종류의 상업 자본이 시장에 유입되었고, 늘어난 푸드트럭들은 한정된 공간에서 서로의 이익을 줄여갔다. 돌파구를 찾을 겸, 잠시 떠나볼까? 세계의 트렌드가 한데 모인, 도시 중의 도시 런던으로.
분무기로 뿌리는 듯한 비가 내리는 춥고 흐린 날들이 이어진다더라-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런던의 풍토가 유독 몸에 맞지 않았던 남편은 숙소 밖으로 나선 지 10분만 지나면 피곤하다며 죽상이었다. 음식도 영 입에 맞지 않는 모양이어서 컵라면을 파는 아시안 마켓을 발견했을 때 처음으로 눈이 커지고 걸음도 빨라졌다. 반면, 나는 여태 몰랐던 '무엇'을 찾아 세계 각국의 요리를 두루 맛보고 싶었다.
잉글리시 크림티*를 즐길 수 있는 작은 티룸들, 피시앤칩스와 에일맥주로 유명한 전통 펍, 슈니첼과 굴라시처럼 평소 접하기 어려운 메뉴가 많은 클래식 레스토랑, 몽환적인 비주얼과 맛의 칵테일을 차가운 스테인리스 빨대로 홀짝이며 라이브 공연을 즐기는 바(bar), 망갈리차 돼지를 이용해서 직접 만든 페퍼로니를 쓰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커스터드 도넛이 맛있다는 베이커리, 영국 최고의 사워도우 빵집, 유명한 카페들... 그리고 비건 식당까지.
* 크림티(cream tea) : 홍차와 스콘에 클로티드 크림, 과일잼을 곁들여 즐기는 영국의 차 문화로 가벼운 식사도 된다. 여러 층으로 쌓이는 화려한 애프터눈티(afternoon tea)에 비해 단출하고 소박한 형태.
비건(Vegan: 육류나 어류, 유제품, 난류, 꿀 등의 동물성 원료를 모두 배제하는 완전한 채식)이라는 단어를 몇 번 듣긴 했지만 낯선 때였다. 페이스북 친구였던 Marie(토스트마스터즈 Toastmasters라는 모임에서 알게 된)가 당시 비건을 주제로 꾸준히 글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어 모임의 회장이었던 나는 영어가 유창한 편이 아니어서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사뭇 진지한 포스팅에 약간 거부감이 들 때도 있었다. 육류와 생선을 거의 먹지 않는 락토-오보 베지터리언(유제품과 달걀을 섭취하는 채식주의자)에 가깝던 내게 비건은 가깝고도 먼 친척 같았달까. 하지만 런던 여행을 하면서 보니 거의 모든 식당이나 프랜차이즈 매장, 빵집 메뉴판에서 어렵지 않게 그 단어를 볼 수 있었다. 'VEGAN'.
이렇게 흔한 단어였다니, 비건 레스토랑에도 꼭 가봐야겠네 싶어 캐주얼한 분위기로 검색해둔 가게를 찾아갔다. 전면이 좁고 안쪽으로 깊은 공간. 꽉 찬 테이블과 복작복작 협소한 공간은 손님으로 만석이었고, 탁자 사이를 비집고 빈자리를 찾아 걷기도 불편했다. 활기차게 인사하며 메뉴판을 건넨 직원분께 무난해 보이는 이름의 메뉴 몇 가지를 주문하고 기다렸다. 생각보다 비싸지 않은 가격에 서빙된 음식들은 의외로 먹음직스러웠다. 맛은 어떨까?
빨간 고추와 초록빛 라임을 넣은 과카몰레는 살짝 풍기는 매콤한 향이 부드럽고 새금한 맛과 잘 어울렸다. 구운 고구마와 찢은 대파를 곁들인 페이크 치킨은 바삭한 튀김옷에서 은은한 강황과 코코넛 향이 났다. 살구빛이 도는 수제 마요네즈도 난생처음 먹는 맛이었다. '퍼지 볼'은 첫맛이 무척 생소했지만 음미할수록 희한하게 적응되었고, ‘더래빗 the rabbit’(직원이 내 발음을 영국식으로 수정해주었다)이라는 칵테일과 먹으면 먹을수록 묘한 조화를 이뤘다. 저마다의 존재감을 드러내듯 씹히는 재료들의 식감과 생생한 향은 가게를 나온 후에도 깊은 여운을 남겼다. 처음 맛본 놀라운 무언가를 감지한 혀와 코, 눈과 귀가 뇌에 지속적인 흥분의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이건 연구할 가치가 있어.'
알고 보니 런던은 비건들의 천국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개인의 취향과 윤리적 소비를 중시한다고 알려진 영국인들의 문화는 비건에도 반영되고 있었다.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먹던 시대를 지난 우리나라도 다양한 식문화와 취향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고, 유기농과 친환경을 추구하는 세계의 흐름에 비춰보아도 미래에는 비건이 늘어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빵도 비건으로 만들면 지금보다 건강하게 오래도록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한국으로 돌아온 지 몇 달 후, 푸드트럭에 방문한 손님의 제안으로 갑자기 매장을 얻는 사건이 벌어졌다. 트럭에겐 비수기인 겨울이 슬슬 다가올 때였다. 그 무렵 우리에게 정식으로 매장을 차리거나 인수할 돈은 없었는데 사정상 비어있던 가게를 전대(임차인이 임대인 동의하에 다시 세놓음) 받게 된 것이다. 위치는 광화문 인근. 야시장과 베이킹 스튜디오를 정리하고 매장을 오픈하느라 한동안은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경복궁과 경희궁, 세종문화회관, 각종 미술관이 가까운 고즈넉한 동네. 유명 로펌과 회사들을 비롯해서 주변 직장인이나 거주민들의 문화적, 경제적 수준 또한 높을 것으로 예상됐다. 여기서 어떤 콘셉트와 메뉴로 첫 매장을 시작해야 할까?
다른 가게들이 지향하지 않는 것을 지향하고 싶었다. 뚜렷하게 규정되기보다는 해석하기 나름인 시선과 분위기를 담은 공간을. ‘나만 알 것 같은' 메뉴를 개발하고, 집에서 방금 만든 것처럼 투박한 느낌을 주는 홈메이드 음식을 만들어야지. 집에서보다 더 좋은 재료를 사용해서, 사 먹는 음식이 이렇게 건강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가게가 되자. 비건 메뉴도 그중 하나였다. 해외여행을 자주 다녔거나 문화적 경험치가 풍부한 손님이라면 흥미롭게 받아들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예상대로 당시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비건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그곳에는 있었고, 연구한 레시피들을 꺼내 하나씩 선보인 비건 메뉴(베이커리와 식사)들은 꽤 반응이 좋았다. 저녁의 한가한 시간 틈틈이 비건 메뉴를 만들고 맛보던 날들 중 정확히 언제였을까, 비건 베이킹의 헤어날 수 없는 매력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