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동물을 다룬다는 이유 때문이었는지 피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고기를 다루는 게 고통스러워졌습니다."
-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셰프의 테이블> 중
프랑스의 파리 중심부에 있는 레스토랑, 아르페주(Arpége)의 셰프 알랭 파사르(Alain Passard). 14세에 요리를 시작해 1986년 아르페주를 열고 1996년 미슐랭 3 스타를 받은 그는 어느 날 동물로 요리를 할 수 없게 되면서 채식 메인 디시를 선보이기 시작한다.
동료나 손님들은 아르페주의 앞날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그가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 말했고, 손님은 줄고 혹평이 쏟아졌다. 그의 레스토랑은 육류를 즐기는 손님이 대부분이었고 미식의 나라 프랑스에서 이 같은 행보는 당시 충격 그 자체였으니까. 프랑스 전통 요리에서는 양파나 비트, 샐러리 같은 재료는 주연이 아닌 조연 또는 가니시(garnish, 장식)정도로여겨진다. 프랑스 요리학교 르꼬르동 블루에 다닐때, 채소를 유독 수북이 올린 접시를 가져온 나를 스승님은 지그시 노려보셨다. 너무 많다고-
자신의 농장에서 당일 가장 신선한 채소를 고르고, 그에 따라 무슨 요리를 할지 결정하기에 매일 메뉴가 바뀌는 아르페주. 특히 한 번 요리한 메뉴의 조리법은 기록하지 않는 알랭의 혁신적이고 예술가적인 태도를 닮고 싶다. 채식 요리의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밤낮으로 고민했던 그는,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채식으로 미슐랭 3 스타를 지켜낸다.
“조리법을 찾을 수 있을지 매일 겁이 나서 소름 끼치기도 하죠. 몇 초라는 짧은 시간에 과연 어떤 일이 생길지 무슨 일이 생기기는 할지 고민해야 해요.” - 알랭 파사르
통상 채식의 끝판왕쯤으로 여겨지는 비건이 한국 사람들의 귀에 익숙해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서울에서 처음 비건 베이킹을 시작하던 때는 비건 식당도, 베이커리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비건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도 시큰둥했고(‘그게 뭐야’ 정도?), 학원이나 책도 없었기에 스스로 레시피를 만드는 일이 큰 숙제였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을 비롯해 다양한 나라의 제과와 제빵 책들을 읽으며 연습하고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우유와 버터와 생크림과 치즈 빼고, 달걀 빼고, 꿀까지 빼도 맛있는 빵을 꼭 만들겠다며.복잡하고 어려웠지만 그만큼 재미있고 가슴 뛰는 일이었다.
막막하고 외롭기도 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레시피들의 재료를 무엇으로 얼마나 대체하느냐에 따라 빵이 전혀 부풀지 않거나 식감이 좋지 않고, 기름지게 느껴졌는데 물어볼 곳이 없으니. 버터나 치즈 같은 동물성 지방이 주는 풍족한 맛을 뛰어넘는 데 한계가 있는 것만 같았다. 비건이 상대적으로 일찍 발달한 나라의 베이커들이 올린 영상이나 텍스트를 통해 방법을 찾아나갔다. 뚜렷한 맛의 재료를 메인으로 삼아 그것을 뒷받침해줄 부재료를 하나씩 대입하면 어떤 대체유와 오일, 견과류, 향신료를 넣었을 때 가장 좋은 맛과 식감을 갖는지 알게 되는 순간들이 생겼다. 잘 알려지지 않았고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일에 도전할 때 성취의 쾌감은 훨씬 크게 마련이다. 그 반대의 경우에 비하면.
요즘은비건 베이킹을 접할 수 있는 한국어 영상이나 책이 많아졌다. 중심이 되는 원리에 익숙해지면 비건 베이킹에는 거의 장점만 존재해서, 일단 한 번 비건 베이킹에 익숙해지면 다시는 일반 베이킹으로 돌아가기 힘들다. 대표적인 매력을 크게 몇 가지만 꼽아보면 이렇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 비건 베이킹의 매력
첫째. 간단하고 빠르다.
우선 많은 도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핸드믹서나 반죽기로 빠르게 공기를 포집해 탄탄한 볼륨을 키우고, 치대는 반죽이 많은 일반 베이킹과 달리 비건 베이킹은 매우 적은 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초보 홈베이커라면 거품기와 알뜰주걱, 몇 개의 보울과 저울 정도면 충분하다. 효소를 그대로 살리기 위해 열을 가하지 않고 만드는 방식의 베이킹도 있어서(흔히 로푸드 rawfood라고 한다) 어느 날 전 지구적 재난이 발생해 전기가 모두 끊어지거나(?) 자연인이 되더라도 빵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그만큼 전력 소모와 소음도 적다.
성격이 급하고 반복 동작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기뻐할 만한 소식 하나 더. 통곡물을 주로 사용하면 한참 동안 가루를 체 칠 필요도 없다. 묵직하고 밀도 있는 반죽에는 체를 치는 과정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대개의 과정은 재료를 미리 불리거나 액체끼리 잘 섞은 다음, 거기에 가루 재료를 혼합해서 굽는 것이 전부다. 발효가 필요한 반죽의 경우에도, 재료들을 섞고 가끔씩 반죽을 접어주면서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리면 대부분 해결된다. 원 볼(One Bowl) 베이킹이 가능한 품목도 많아서 설거지에 쓸 노동력과 시간을 대폭 절감할 수 있다.
음식을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먹는 시간의 차이가 너무 크다고 느낀 적이 한 번쯤 있다면? 먹을 것을 준비하는 데 드는 시간과 정성으로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싶다면? 빵 만드는 즐거움을 원초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누리고 싶다면? 이제는 비건 베이킹을 경험해보시길.
두 번째. 감각과 세계관이 확장된다.
일반적인 베이킹을 대체할 수 있는 비건 베이킹의 재료를 예로 들어보자.
우유 → 오트 밀크, 아몬드 밀크, 두유, 캐슈넛 밀크, 마카다미아 밀크 etc.
버터 → 코코넛 오일, 홍화씨유, 포도씨유, 올리브유, 비건 버터 etc.
생크림 → 코코넛 밀크 또는 코코넛크림, 캐슈넛 etc.
달걀 → 볶은 아마씨 + 물, 치아씨드 + 물, 병아리콩을 불린 물(aquafaba), 바나나 etc.
동물성 원료를 대체할 수 있는 화학적 성질이 있으면서 주된 맛과 어울리는 것을 찾으려면, 다채로운 식물성 재료를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지며 특징을 탐색하게 된다. 생소한 재료들의 맛과 향은 잠들었던 몸의 감각들을 흔들어 깨우는데, 어떤 물질의 특성을 알기 전에 할 수 있는 베이킹과 알고 난 후의 베이킹에는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는 말처럼. 평소 접해보지 않은 식재료를 사용하면서 음식을 한층 조심스럽고 천천히 음미하게 되는 것도 큰 수확이다. 몰랐던 영역을 적극적으로 인지하면서 연관된 관심사들이 생기고, 사물이나 삶을 대하는 시각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지구의 추정 생물량 중 식물은 전체의 80%를 차지하고 인간은 0.01%에 불과하다는데(2018년 미국립과확원회보), 지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식물을 이해하는 건 어쩌면 생존을 위한 필수 요건은 아닐까?
세 번째, 소화가 잘 되고 건강해진다.
비건 베이킹을 연구하던 어느 날 문득, 묵직하고 더부룩하던 속이 편안해졌음을느꼈다. 테스트하며 먹는 빵의 양이 상당했음에도 위장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부글거리지 않는다는 게 신기했다. 식이섬유와 무기질이 풍부한 빵은 그렇지 않은 빵에 비해 소화가 잘 될 뿐만 아니라 장내 유익균을 활성화시키고, 혈전과 콜레스테롤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장기간 비건빵을 먹고 자연의 맛에 길들여지면 화학 첨가물이 들어간 자극적인 음식에 대한 욕구가 줄고 마음도 조금씩 평화로워진다.
여성을 위한 귤팁 하나! 비건빵으로 하루 1끼를 먹고 비건식으로 하루 1~2끼를 먹으면서 나는 예전과 달리 규칙적이며 쾌적한 월경 기간을 보내고 있다. 거의 매일 마시던, 우유가 들어간 라테와 유제품이 들어간 빵을 먼저 끊었기 때문이다.인간이 아니라 송아지를 위해 생산되는 소의 젖, 그중에서도 특히 상업적으로 생산된 우유는 사람의 호르몬과 생식기관에 매우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친다.
네 번째, '맛있다'.
동물성 원료를 사용한 빵과 비건빵의 맛은 다르다. 간혹 비슷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지만, 비건빵에는 물리지 않고 계속 먹을 수 있는 담백함이 장착되어 있다고나 할까. 혀에서 사르르 녹아 사라질 만큼 부드럽거나 혀에 착 달라붙는 강한 맛보다는, 낯설다가도 씹을수록 조화롭게 느껴지는 섬세한 재료 본연의 맛이고 그 덕에 포만감도 좋다. 뒷맛도깔끔해서 필요 이상의 식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한 마디로 비건빵을 먹다 보면 맛있다는 개념이 내적으로 달라진다.
습관처럼 유제품 금단 증상에 시달렸지만이제는 유제품이나 달걀을 넣은 빵을 먹으면 거북한 느낌이 든다. 간혹 시중에서 판매하는 빵이나 케이크를 맛볼 때가 있는데, 찰나의 고소함 뒤에 침전물처럼 가라앉으며 입안과 속을 개운하지 않게 만드는 좋지 않은 요소들과 텁텁함이 금세 느껴진다. 동물성 원료로 만든 빵을 먹고 싶은데 참는 것이 아니라, 점점 먹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쯤에서 고백해야겠다. 매일 메뉴가 바뀌고 당일에 라인업을 공지하는 이유는 그날 무엇이 나올지 나도 잘 모르기 때문이라는 걸. 휴무일에 눈에 띈 재료를 사다가 무언가를 만드는 날도 있고, 출근길에 우연히 떠오른 영감으로 오늘은 이걸 만들자며 달려드는 메뉴도 있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엉망진창이 되기도, 예상보다 멋진 것이 나오기도 하지만 실패 여부와 상관없이 이전과 다른 시도를 했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 그런 시도들이 끝내 만족스러운 빵을 탄생시키니까. 여러 번 실패하고 지쳐서 한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품목도 나중에 떠오른 아이디어로 만들어보면 성공할 때가 많다.
비건 베이킹을 처음 시작하던 때는 어렵게 완성한 레시피에 의지하며 흔들리지 않으려 했다. 지금은 매일 조금씩이라도 레시피를 수정해보고 기존의 틀에 매이지 않으려고 한다. 밸런스 보드를 탈 때 균형을 잡으려면 오히려 양쪽으로 조금씩 움직여야만 하듯이. 계속 발전시키면 언젠가는 레시피를 전혀 기록하지 않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알랭 파사르 셰프처럼.
빵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입에 넣어주면 솔직하게 평가하는 남편,남은 빵과 실패한 빵을 질리도록 드셔 주신 시부모님, 매장에 올 때마다 도움이 될 만한 코멘트를 해주시는 형님, 밥보다 빵을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친정 가족들, 그리고 나보다 더 맛있게 비건빵을 드셔주시는 손님들과 함께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조리대 앞에 선다. 더 이상 비건 베이킹이 외롭지 않다. 최근 자주 와주신 손님께 "비건을 하세요?"라고 여쭤보니 그 손님은 수줍게 웃으며 잊지 못할 답변을 해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