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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Sep 30. 2022

제주 여행의 마지막 날.

2022.9.29



 창밖은 투명한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제주에서 목포로 가는 배를 탄 지 3시간째. 일상으로 돌아가는 중이지만 아직은 여행 중. 거대한 배 안에서 비건 아닌 일반 빵도 사 먹고,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마셨다. 검푸른 바다 물결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하얀 난간을 두른 갑판 위에서 찬바람도 실컷 맞았다.


 "아, 움직인다."

 퀸 메리호(배의 이름)가 출발할 때 어쩐지 야속했다. 멀리서 보면 브로콜리처럼 오돌토돌하게 나무들이 붙어있는 듯한 오름들이 리듬감 있게 솟아있는 제주. 바로 눈앞에 있지만 돌아갈 수 없다, 적어도 당분간은. 눈앞의 섬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창에서 떼지 못한다. 멀리서 봐도 아름답네. 안녕, 또 올게.


 눈이 번쩍 뜨이게 맛있는 음식도 자꾸 먹으면 맛을 잘 모르게 된다. 일상도 반복이 쌓이면 권태로워지기 쉽다.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 매사에 싫증을 잘 내는 나여서인지 의식적으로 쓰지 않는 단어를 이곳에 쓰니 묘한 쾌감이 든다. 닮은 사람들이 서로 좋아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할까, 닮은 단어를 일부러 쓰지 않는 건.


 요식업을 하며 팬데믹을 겪은 지 약 4년. 3년 전, 2년 전, 1년 전을 상상하면 해가 갈수록 크게 내려놓았으니 잠시 정지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조차 자유로운 기간을. 같은 나라지만 작은 공화국 같은 제주는 부담스럽지 않은 휴식에 적당해 보였다. 해외처럼 멀지도, 떠나기 위한 거대한 결심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곳. 사방이 뚫려 있는 동시에 고립적인 특성을 가진 것도 좋았다. 제주도로 들어가면 스스로의 섬에서는 잠시 해방될 것이다.


 왼손 양치를 하거나 거꾸로 그림을 보듯이, 보통은 처음부터 기록하는 여행을 이번엔 뒤에서부터 거꾸로 기록하려고 한다. 다양한 얽매임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나지 못하는 나, 지금보다 창의적이고 싶지만 마음먹은 만큼 표현하지 못하는 나 그리고 비슷한 종류의 사람들을 위해.




 

 마지막 날의 아침은 숙소(#취다선 리조트)에서 진행하는 아침 명상과 함께 시작됐다. 부스럭대는 소리에 깬 남편을 방에 둔 채 살금살금 나와 지하 1층으로 갔다. 7시 10분. 생명의 나무처럼 천장으로 뻗어 펼쳐진 구조물과 커다란 에너지의 흐름을 그린 보랏빛 천장 일러스트가 인상적인 커다란 홀. 진회색의 두터운 방석이 2장씩 겹쳐 놓여 있고 각자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았다. 체크인할 때 뵈었던 강사님이 오셔서 방석 두 장 중 위의 한 장을 반 접어 앉아보라고 하신다. 양반다리로 바닥에 앉는 것보다 한결 편한, 낮은 명상 의자를 만드는 방법이다. 편한 자세로 앉자 호흡 연습이 시작됐다. 평소 연습하는 명상과 호흡이 따로 있지만 오늘은 다른 길을 따라가 본다.


 눈을 감고 20분쯤 지나자 왼쪽 다리가 찌릿찌릿. 왜 늘 왼쪽일까? 침묵 속에 똬르르르르, 어디선가 물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숙우에 식혀 조금씩 덜어낸 차를 한 잔씩 가져가라고 하셔서 일어섰는데 다리에 감각이 없다. 돌아와서 다시 좌선. 명상을 할 때 집중할 대상의 범위를 넓히는 것보다는 좁히는 쪽이 도움이 된다고 하셨다. 차를 채운 조그만 찻잔 또한 훌륭한 명상 도구가 된다.


 알려주신 차 명상법을 써보면.


1. 한 손에 찻잔을 들고 잔의 무게와 질감을 가만히 느껴본다.

2. 코 쪽으로 차를 가져와 향을 세 번에 나누어 취한다.

3. 차의 맛을 세 번 나누어 음미한다. 첫 모금은 입술에 닿는 느낌 정도만 알아차리고(맛이 어떻다거나 좋다 싫다 등의 평가 대신), 둘째 모금은 전체 입안을 헹구듯이 머금고 맛보다가 식도로 넘어가는 차의 흐름까지 느껴본다. 마지막으로 잔에 남은 차 몇 방울은 혀 위에 올려두었다가 천천히 삼킨다.


 눈을 떴을 때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눈을 감아야 모든 것이 보인다-라고, 선생님의 스승께서는 말씀하셨다고 했다. 약 45분의 명상을 마치고 쉬는 시간을 가진 후 1시간의 하타 요가 수업이 이어졌다. "~셋, 넷!"하고 카운트를 외치는 씩씩한 목소리의 선생님은 가늘고 군살 없는 몸이 작은 근육들로 꽉 차 있다. 통기성 좋은 반팔 광목 셔츠와 바지를 입고 왔지만 땀이 송골송골. 샤워 후 제주 미역이 듬뿍 들어간 국을 조식으로 먹고 차로 향했다.


 


평소 둘레길이나 산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는 남편을 구슬려, 그래도 오름(언덕) 하나는 가보자며 도착한 아부오름! 360여 개 이상으로 추정되는 제주의 오름들 중 오르기 쉽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입구에서 해충 기피제를 서로의 옷에 뿌리고, 초입부터 시작되는 가파른 경사길을 올랐다. 금세 숨이 차올랐지만 5분만, 하고 꾹 참으니 어느새 정상이다. 지나치게 울창한 소나무들에 가려있긴 했지만 깊고 광대하게 자리 잡은 분화구도 보였다. 마치 눈을 감아야 잘 보이는 것처럼.

 짚이 깔린 산책로를 따라 오름을 한 바퀴 돌면서 거대한 소똥 폭탄(!)과 매끈한 버섯들도 발견했다. 제주에 살면 크고 작은 오름을 다니는 재미도 쏠쏠하겠네.



 


 점심은 튀긴 두부가 먹음직스레 올라간 비건 샐러드와 토마토파스타(#가든업)를 먹었다. 입가심으로는 젤라또(#젤마씨)를 먹으러 갔는데, 제주 토종 유자인 '댕유지'로 만든 젤라또도 있었다. 정말 잊지 못할 쓴 맛이었지만 쓴 맛을 좋아하니 한편으로는 중독적이었다.

 국산팥을 사용한다는 오메기떡 가게(#춘심이네오메기떡)에 들러 떡도 넉넉히 샀다. 통팥을 다닥다닥 붙여 둘러싼 듯한 오메기떡은 달지 않고, 구수한 팥맛이 적당히 탄력 있는 식감과 함께 느껴졌다.

 

 배에 타기 전 20분쯤 여유가 있어 제주의 특산품을 모던하게 전시한 편집샵(#디앤디파트먼트 제주)에 들러 눈요기. 무얼 사지 하다가 계산대 근처의 동백기름을 집어 들었다. 제주는 동백으로도 유명하다는데 아직 흐드러진 동백을 본 적도, 동백기름으로 요리를 해본 적도 없다. 두피를 포함한 피부에 바르면 가려움도 덜어주고 보습효과도 있다니 겨울까지 써 봐야지. 기관지 질환에도 유용하고 나뭇결에 발라도 좋다는데, 향은 참기름보다 더 고소하다니 알수록 궁금해진다.


 몸을 옥죄는 코르셋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고 활동이 편하면서도 기품 있는 옷을 만든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이 가장 좋아한 꽃이 동백이라던가. 동백꽃을 피우는 씨앗에서 짠 기름이라면, 화려한 듯 단아한 동백의 생명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을까? 그렇게 따지고 보면 세상의 모든 기름이 귀하디 귀한 건 아닐까.

 

  차 문을 닫고, 제주항 여객터미널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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