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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Oct 04. 2022

제주여행 7일차의 기록

9월 28일


 8시 10분쯤 잠이 깼다. 어제 미리 사놓은 비건 애플오트스콘을 꺼냈다. 우물우물 씹으며 오늘 뭐 하기로 했지? 핸드폰을 켜고 저장된 스케줄도 꺼내본다. 눈을 뜨자마자 무언가를 먹는 건 오랜 습관이다.


 작은 바나나도 냉장고에서 하나 꺼내 먹고, 매트리스 앞의 낮은 탁자에 앉아 명상 교재를 꺼냈다. 로스앤젤레스에 센터를 둔 SRF(Self-Realization Fellowship)에서 매주 레슨 책자를 보내주는데, 밀리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아 여행에도 챙겨왔다. 영어 교재라 한글처럼 술술 읽히지 않으니 처음에는 구글 번역기로 전체 내용을 파악하고, 두 번째로 읽을 때 원문의 단어를 해석하면서 읽는다.


 30분가량 공부하고 명상 방향인 동쪽을 찾으려 나침반 앱을 켰다. 도톰한 스프레드를 펼친 채 앉아 척추를 곧게 세우고, 복부를 살짝 당길 것. 가슴은 살짝 내밀고 말려있는 어깨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는다.


 조금 일찍 나가야 한다고 어제 말해두어서인지 명상이 끝날 때쯤 남편이 일어났다. 함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빠뜨린 물건은 없는지 몇 번씩 돌아본다. 별일 없지? 짐을 싣고 모닝커피를 마시러 출발~!


 

 커피 메뉴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고 해서 찾아간 로스터리, #코데인커피로스터스. 조명 대신 자연광이 은은히 들어오는 실내에는 유쾌한 재즈 음악이 흘렀다. 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장님인지 피아노, 기타, 바이올린, 멋진 스피커와 CD도 보이고. 3일의 추출 시간과 2차례의 여과과정을 통해 풍부한 향과 깔끔한 애프터를 강조했다는 <코데인커피>와, 미온의 비엔나커피에 수제 카놀리가 디핑된 <카페 시칠리아>를 주문했다.


 차에서 마시며 다음 장소로 이동했는데, 직접 구운 듯한 까놀리의 바삭한 겉과 달지 않은 필링을 비엔나 커피에 푹 찍어 먹는 즐거움에 놀랐다. 커피 메뉴뿐만 아니라 특색 있는 디저트까지 직접 만들어 신선하게 제공하는 가게는 흔치 않으니까. 제주에서 가본 카페들 뿐만 아니라 최근 몇 년 동안 방문한 카페를 통틀어 '정성이 느껴졌다'는 말을 이곳에 쓰고 싶다.


 


10시 30분에 문을 여는 #바이나흐튼크리스마스박물관 또한 꼭 가고 싶었던 장소다. 만약 12월 25일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기다리는 동안 묘한 두근거림과 기쁨을 주는 날 크리스마스. 그런데 1년 내내 크리스마스를 맛볼 수 있는 장소가 있다고?

 박물관 옆에 닮은꼴 카페와 빈티지 상점도 보였지만 나오면서 보기로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목조풍 실내는 유럽의 시골 어딘가에서 크리스마스를 맞는 착각을 일으킨다. 크리스마스씰, 작은 램프, 글루바인, 맥주, 호두까기 인형, 캐러멜 같은 기념품과 전시품들이 한데 어우러진 1층. 2층으로 가는 계단 양쪽으로도 귀한 포스터와 수집품이 많아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점점 빠져들었고, 종이에 출력해  액자에 넣은 설명들은 여느 박물관의 아크릴 글씨보다 따스했다. 곳곳에서 작은 탄성을 지르며 동화 속 크리스마스 요정들을 만날 수 있었던 공간. 입장료도 무료라 귀여운 소품들을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나오면서 들어설 때 본 빈티지샵에 들렀다.


 과연 특별한 게 있을까-하고 들어간 상점에는 주인분이 계신 1층과 달리 2층에 무려 4개의 방이 있었다. 창틀과 벽면까지 빼곡한 빈티지 소장품들에 충격. 여유 시간은 겨우 10여분인데, 위기 상황이다. 뛰는 가슴으로 이 방 저 방을 빠르게 드나들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육각 트레이에 실용적인 손잡이가 달린 황동 촛대, 나비 한 마리가 사뿐히 내려앉은 모양의 스너퍼(촛불을 끄는 기구), 백금빛으로 그림과 글씨가 양각된 빨간 가죽 책갈피가 손에 들려있다. 이런 상점이 있는 줄 진작 알았더라면... 더 보고, 데려오고 싶었지만 예정에 없던 이 장소를 만난 것만으로도 행운이겠지?


쇠소깍 포토존 그리고 고소한 보말죽.

  

 지체한 탓에 서둘러 쇠소깍으로 출발했다. 제주도 방언으로 쇠는 효돈마을, 소는 연못, 각은 접미사로서 끝을 뜻한다. 제주 전통 뗏목 '테우'를 타려고 며칠 전 인터넷 예약을 해두었다. 확인 전화가 와서 주소지인 주차장(유료)에 자리가 없다고 하니 그 옆의 초대형 빵집(무료)에 차를 대라고 하셨다. 좀 늦게오깅 잘 했네. 10여 명의 승객이 뗏목에 오르자 손으로 밧줄을 당겨 뗏목을 이끄는 선장님은 재치 있는 입담을 늘어놓으셨다.


 갈 때는 곰이지만 올 때는 사자인 바위, 지금은 밀물이라 보이지 않지만 썰물 때 보이는 동굴들, 바위틈에서 솟는 용천수, 중간에 앉아 핸드폰이나 보면서 몇백만 원을 번다는 안전요원(?), 코스가 길어져 힘드니 누군가 물에 좀 빠져달라는 농담까지. 위에서 계곡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에게는 여기가 동물원이냐며 되레 귤을 던지기도 하고, 뭉게구름이 뜨면 그림 같다는 스팟(그 날은 없었지만)에서 승객들 사진도 찍어주셨다. 뗏목에서 내려 선장님이 추천하신 식당(#고찌올레)에서 고소한 보말죽과 보말칼국수를 먹고, 마지막 숙소로 떠났다.


 

#취다선리조트에 도착하자마자 뒷다리에 흰색 긴 양말을 신은 듯한 무늬의 검은 고양이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응? 너 개냥이니?" 하며 옆구리를 살짝 쓸어주자 기분이 좋은지 발랑 드러누워 하얀 배까지 보여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만지고 쓰다듬어도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녀석에게 "우리 이제 들어가야해."하며 목걸이에 쓰인 이름을 살폈더니 '타로'였다. "타로, 이따 또 보자!"


 체크인을 했다. 약간의 흰색 머리카락을 굳이 염색하지 않고 자연스레 내버려 둔, 고요한 친절을 가진 직원분(사장님일지도)께. 명상 리조트이니 조용히 해달라는 당부를 들으며 티룸을 예약하고 방에 짐을 둔 채 내려왔다.


 

  네 종류의 차 중에서 제주 전통의 유기농 볶은 녹차이자 카페인이 적다는 <우빈>을 골라 티룸으로 안내받았다. 떨어지는 물소리가 또렷하고 기분좋게 들리고 창밖으로 작은 연못이 보이는 방. 허투루 골라 놓지 않은 물건들과 평온한 분위기에 환대받는 기분이었다. 가장 값싸고 대중적인 물건들로 꾸며진 전날의 숙소와는 정반대여서, 하루에12만원을 더 지불하는 숙소지만 오히려 훨씬 저렴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실로 안내해 주신 분께서 조용히 차를 가져와 다구와 우리는 방법을 간단히 설명해주셨고, 팽주(차 대접하는 사람)와 팽객(손님)이 된 우리는 차와 다식을 벗삼아 한가로운 오후를 즐겼다.



 

 방으로 돌아오니, 깜찍한 다기 세트와 차 그리고 책 한 권이 놓여있다. 제주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었는데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다 보니 1시간이 훌쩍. 이 책이 여기 머무는 불특정 개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방에 놓인 종이책 한 권은 예상보다 근사한 경험이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숙소에서 운영하는 그날의 프로그램인 싱잉볼 세션에 참여하기로 신청했기 때문이다.


 누워서 사물의 진동과 소리를 들으며 깊은 이완을 경험하는 것은 누군가의 헌신적인 연주 없이는 힘든 일이고, 남편과 함께 참여하는 기회는 처음이라 설렜다. 명상이 왜 좋고, 싱잉볼의 매력이 어떤 점인지를 말과 글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까. 아무리 사랑하는 배우자라고 해도 그의 첫 싱잉볼 세션까지 대신 경험해줄 수는 없는 일.


 본격적인 연주에 들어가기 전, 강사님은 앉은 자세에서 소리 명상을 알려주셨지만 나는 얼른 자리에 눕고 싶었다. 잠시 후 크리스탈 싱잉볼과 네팔 싱잉볼, 자피어차임의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가수면 상태에 들어갔고... 조금씩 코를 골다 자기 소리에 흠칫 놀라 깨곤 했다. 낯선 사람들과 낯선 공간에 누운 채로 간간이 코를 골만큼 푹 쉬었다는 점만으로도 뿌듯했다.


 개운해진 몸으로 저녁을 먹으러 나와 개냥이 타로를 몇 번 불러봤지만, 녀석은 자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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