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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Oct 06. 2022

제주여행 6일차 이야기

9월 27일



 조식을 먹으러 게스트하우스의 공용 공간에 내려갔다. 메뉴는 짜장밥. 남편이 좋아하는 하이라이스가 나오는 날도 있다던데.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봄봄이(숙소에서 키우는 개) 얼굴을 조물조물 만져줬다. 하얀색과 캐러멜색이 섞인 긴 털을 가진 봄봄이는 만날 때마다 꼬리를 낭창낭창 흔들며 느긋하게 움직인다.


 두 그릇 모두 밥보다 소스를 훨씬 많이 끼얹어주신 사장님이 먼저 말을 거신다.

"두 분은 연인? 어디서 오셨어요?"

 평택에서 온 부부이고, 제주도는 살기 좋으시냐고 되여쭈니 사장님은 말씀하셨다.

"평택은 그래도 도시잖아요. 여기는 시골이에요. 일단 먹는 게 비싸고요. 사람마다 다르긴 할 텐데 포기할 걸 포기하면 삶의 질은 높아지는 것 같아요."


 평택이 도시- 서울에서 볼 때는 시골이라 이사한 곳인데 제주에서 보는 시각은 그럴 수 있겠구나. 피클과 단무지를 곁들여가며 열심히 먹어도 짜장 소스가 남아 죄송한 표정을 하니, 사장님은 원래 소스가 많다고 하신다. 알면서 많이 주신 건 왜일까? 소스가 남는 게 밥이 남는 쪽보다 마음이 편해서? 난 왜 이런게 궁금한지.


 짐을 정리하고 나와 #만장굴로 향했다. 총길이가 8.9Km이며 그중 1km 정도만 공개되어 있는 세계적 규모의 용암 동굴. 험한 지형에 탐사하는데 왕복 1시간이 걸린다기에 남편이 가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내부가 시원하다고 하니 선뜻 간다고 해서 오전 일정에 넣었다.


 천연기념물 제98호이자 유네스코세계자연유산인 이 동굴은 그동안 봐온 동굴들과 다른 느낌을 주었다. 거문오름에서 분출한 용암이 주변을 녹이고, 식으며, 흘러가면서 생성한 흔적들. 생물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아 보였지만 박쥐를 비롯한 동굴 생물과 식물도 많다고. 단체 관람을 온 초등학생들의 목소리가 짜랑짜랑 울리면, 우리는 걷는 속도를 최대한 늦추거나 높였다.


 

 계단을 올라와 헉헉대는 숨을 고르며 차를 마시러 갔다. 한쪽 벽을 크게 뚫은 창으로 비자림을 볼 수 있는 카페(#고사리카페)에는 동굴 같은 울림의 잔잔한 음악이 퍼지고 있었다. 귤피차에 에스프레소를 넣어 마시는 티커피인 '고사리커피'와 '당근차'를 주문. 리뷰 이벤트에 참여하면 제주 천연허브인 순비기를 주신다고 해서 무심코 리뷰를 작성하다 생각에 빠졌다. 남의 이벤트에 참여는 하지만 막상 우리 가게 리뷰 이벤트를 못하는 까닭은? 뇌물로 좋은 평가를 사는 데는 거부감이 들지만 반대로 그런 평가를 파는 건 왜 상대적으로 괜찮게 느껴질까? 마음에서 우러난 리뷰가 아닌 건 똑같을 텐데…


 점심을 먹고 #칠십리시공원을 찾아갔다. 제주의 센트럴파크 같은 곳으로 천지연 폭포외 예술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는 글을 봐서 기대가 컸다. 처음에는 칠십/리시/공원 으로 읽었다. 칠십 명의 리시(불사의 영역에 이른 힌두교의 선인들)가 사는 공원이라니 신비롭고 멋질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 칠십리/시/공원으로 읽어야 했다. 서귀포와 관련된 '시(詩)'가 많은 공원이라는 뜻.


 입구에 들어서니 햇살 아래 게이트볼을 즐기는 어른들이 계셨다. 공사 중인 길의 반대쪽으로 걸었는데, 걷다 보니 공원 바깥쪽을 돌다 허무하게 끝나는 숲길이었다. 해수욕을 즐길 만큼 제주도의 9월 말은 따뜻하지만 그 중에서도 서귀포 날씨는 유독 한여름을 방불케했다. 연신 땀은 흐르고, 보고 싶은 것들을 보는 대신 도로 쪽으로 한참 걸어 주차장에 돌아왔다.

'방황은 여행의 묘미지.'

세수를 하고 짭짤한 땀 맛을 느끼며, 내비게이션에 다음 장소를 찍었다.



 #대포주상절리의 위용은 기대 이상이다. 어떻게 저런 지형이 생길 수 있는지, 설명을 읽어봐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십, 수백 자루의 연필을 모아 뚝뚝 분질러놓은 것 같은 오육각형 기둥들이 바다 위에 병풍처럼 펼쳐진 모습. 처음 이곳을 발견한 사람은 얼마나 경이로웠을까?


비건 디저트 가게, #펜고호다(제주도말로 '편안하다'는 뜻)

  충분히 걸었으니 일찍이 눈여겨본 비건 디저트 가게로 쉬러 갔다. 이국적인 문이 인상적이다. 글루텐프리 케이크와 음료를 먹었는데 슬프게도 내 손으로 만드는 편이 훨씬 입에 맞는다는 걸 확인했다. 가끔은 나도 누군가 만들어주는 빵을 먹고 싶은데. 그래도 다음날 아침에 먹을 스콘 하나는 따로 구입했다. 숙소에는 오븐이 없기에, 런던의 어느 비앤비에서 스콘을 구워먹던 기억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나중에 게스트하우스를 열면, 오븐도 놓고 베이킹 클래스도 열어야지.


  제주 여행을 위해 예약한 숙소는 다섯곳. 번거롭더라도 여러 숙소를 경험하면 그 자체로 또 다른 여행이 되는 것 같아서다. 이번 숙소는 <스트릿맨파이터>라는 방송을 보기 위해 크고 화질 좋은 TV가 있는 방을 검색해서 찾아냈다. 그래서일까, 방에 들어서자마자 당연히 더블 침대일 줄 알았던 침대가 1인용이어서 충격을 받았다. 아, 신혼 기분 나는데?


숙소에서 끓여먹은 <라면왕 김통깨>!

 저녁을 먹으러 주변을 산책한 결과 먹고 싶은 음식이 보이지 않아 라면을 끓여먹기로 했다. 편의점에 가서 새로 나온 라면과 김치, 과자를 사서 의기양양하게 방으로.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도 밖에서 저녁 사 먹는 것보다 싸! 낯선 데서 라면 끓이는 재미도 있고.

 그런데 TV가 이상하다. 아무리 채널을 돌려도 우리가 보려던 그 채널이 없는 것 같았다. 몇 번씩 확인해본 결과 숙소에 연결된 건 하필이면 그 채널이 없는 지역 케이블 TV. 이 숙소의 최대 장점은 TV인데 어째서 그 채널만 나오지 않는건지.

 결국 노트북으로 TV를 봤다. 작은 화면도 적응되니 볼만은 했다. 남편과 과자도 먹고, 과일도 먹으며 뒹굴거리다 보니 또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은 천천히 일어나야지. 다음에 TV 있는 숙소를 예약할 땐 보고 싶은 채널이 나오는지도 꼭 물어봐야겠어… 조금씩 눈이 감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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