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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Oct 12. 2022

제주여행 5일차, 서핑surfing의 기억

9월 26일


 제주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생애 첫 서핑(surfing, 파도타기)을 배우기로 한 날이다.


 오전 명상을 하고 어제 먹다 남은 식빵과 에너지바를 먹으며 책을 읽다가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찾아간 곳은 제주 향토음식점으로도 유명한 #선흘방주할머니식당. 방송에 수차례 나왔다고 해서 오히려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더 인상 깊었던 맛집이다.


 

 여행객보다 지역민이 많아 보이는 내부는 북적북적 활기찬 분위기. 아들이 직접 농사지은 서리태와 두부콩으로 만든다는 검정콩국수와, 밀가루 없이 도토리+메밀로 만든다는 도메칼국수를 주문하고 음식을 기다렸다.


 검정콩국수에는 노란빛이 예쁜 단호박 면이, 도메칼국수에는 탄력 있어 보이는 황갈색 면이 소복이 담겨 나온다. 반듯하고 납작한 단호박면과 달리 도메칼국수는 면이 더 도톰한 편.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법이라 남편 앞에 놓인 도메칼국수부터 맛봤다. 면이 쫄깃하면서 고소하고, 짭짤한 국물이 적당히 배어 아주 맛났다. 콩국수는 간이 거의 되어 있지 않고 너무 차갑지 않아 좋았는데, 혼자 먹기엔 많아 남기면서도 아까웠다.


  충분히 배를 채웠으니 이호테우 해변으로 출발~!


 주차장과 해변에서 모두 가까운 자리에 작은 목조 건물인 서핑 강습소가 보였다. 수영복 가방을 챙겨 들어서니 친절하게 맞아주시는 황토빛 피부의 직원분들. 신고 온 운동화를 강습소에 비치된 크록스로 갈아 신고, 신청한 대여용 슈트를 받아 탈의실로 갔다. 속옷만 입어도 된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수영복을 챙겨갔는데, 오랜만에 수영복을 입으려니 왜 그리 힘든지. 신혼 때 산 수영복이라 그런가? 샤워장을 겸한 탈의실에서 낑낑대며 온몸을 수영복 안에 밀어 넣었다. 거기에 꽉 끼는 슈트를 착용하니 이중으로 몸이 조여 옴짝달싹할 수 없고, 군살은 적나라하게 불거졌다. 건강미를 추앙하는 고대 그리스에 태어났더라면.


 강습에 참여할 사람은 총 여섯 명, 세 커플이었다. 안전교육부터 받았는데 보드의 부위별 명칭과 꼭 지켜야 할 사항, 사례별 대처법을 알려주셨다. 차례로 몸을 적시고 해변으로 걸어가 보드를 받아 드는데 생각보다 묵직하다.


 지금이 가장 멀쩡할 때니 먼저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강사님 말씀에 보드를 세운 채 찰칵-! 슈트를 입었을 땐 다리를 붙이고 찍는 것보다 한쪽 다리를 쭉 뻗어야 길어보인다며 직접 포즈까지 취해주시고, 서퍼들의 손인사도 알려주신 강사님은 자세를 바싹 낮춘 채 셔터를 누르며 모두를 유쾌하게 해주셨다.


 보드를 내려놓고 엎드려 기본 자세를 배웠다. 코어 근육이 중요할 거라는 섣부른 예상과 달리 준비 자세에서 많이 사용하는 건 기립근(척추세움근). 요가의 코브라자세, 도마뱀자세와도 유사한데 반복해서 앞가슴을 들어올리는 것만으로도 꽤 힘이 든다.

보드에서 일어서는 과정(=테이크오프)을 크게 4단계로 요약해보면...


1. 대기 : 보드 위에 엎드린 자세에서 가슴옆에 손을 붙인다. 시선을 두는 곳이 도착할 지점이니 시선은 정면!

2. 푸쉬 : 양팔을 쭉 뻗어 상체를 세우고 양쪽 발뒤꿈치를 서로 붙인다.

3. 뒷발(사람마다 편한 쪽이 다르다)을 반대쪽 다리의 무릎으로 끌어와 붙인다. 마치 숫자 4처럼.

4. 뻗어있는 발을 재빨리 양팔 가운데까지 끌어오고, 나머지 발이 뒤로 밀리지 않게 유의하며 일어선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방법은 다리가 마치 닭날개가 접힌 모습같다고 해서 '치킨윙'자세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글을 쓰다 말고 기억을 떠올릴 겸 요가 매트에 엎드려 다시 자세를 취해보니 역시 쉽지 않다. 기본 체력부터 길러야할 듯.


 

 서퍼들의 생명줄이자, 우리나라에서는 미착용시 불법이라는 '리쉬'를 발목에 착용하고 바다로 나가 먼저 패들링(양손을 저어 앞으로 가기)을 했다. 수영과 달리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아 모두들 당황한 기색. 흩어진 여섯 명을 불러모은 강사님은 파도 한 점 없는 호수같은 바다라며 탄식하시고는, 한 명씩 불러 배운 자세를 취하게 했다.

 

"자, 우리 시선 어디로 둔다고요?정면에. 앞을 보세요!"

"더더더! 앞으로 가야해요! 조금씩 앞으로 더더!"

"자세 낮춰요! 아이고!"

"그렇지! 됐다~!"


보드 위에 엎드린 한 명 한 명에게 계속해서 다정하게 말을 걸며 격려하고, 파도를 살피며 타이밍에 맞춰 보드를 밀어주고, 일어설때까지 눈을 떼지 않고 소리쳐주셨는데 어쩜 그렇게 친절하신지. 강습 시즌 외에는 서핑만 하신다는데 변화무쌍한 파도를 즐기며 얻는 내면의 힘일까? 한 방울의 바닷물에도 바다의 모든 속성이 담겨있듯이, 사람의 말 한 마디와 표정 하나에는 그 사람의 모든 속성이 함축되어 있다.


 

처음 서핑을 배우는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시선이었다. 일어서기 직전 앞으로 쭉 나오지 않는 다리가 신경쓰여 자꾸 정면이 아닌 보드를 보니 물속으로 자꾸 처박히는 것. 끝까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할 때만 일어선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부분적으로 미세한 파도가 생겨나 조금씩 위치를 옮겨가며 테이크오프를 연습했다. 강사님의 넘치는 에너지 덕분에 강습생 모두가 점차 보드에서 일어섰다. 잔잔한 파도에서는 체구가 작은 사람일수록 일어서기 쉽고, 체격이 좀 있는 사람은 큰 파도가 있는 곳에서 타는 게 좋다고 하셨는데 그래서인지 체구가 작은 여자분들, 특히 강습을 두 번째 듣는다고 하신 분의 자세가 안정적이었다.


 파도가 너무 없다며 보너스로 더 해주신 수업까지 마치고 자유 시간. 보드에 누워 하늘도 올려다보고 혼자서 패들링을 하며 방향을 바꾸는 연습도 하다가 목조 건물로 돌아왔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머리도 말린 후 강사님께 인사를. 고마움과 아쉬움에 뒤돌아보니 강사님도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고 계셨다.


 서핑을 무사히 마친 기쁨을 안고 젤라또 가게에 갔다. 테이크아웃만 가능한 매장이라 차로 와서 남편과 젤라또 타임.


비건 메뉴가 많은 젤라또 매장, #브라보젤라또


 

비건 메뉴의 종류를 여쭤보고 무화과와 토마토 젤라토를 골랐는데, 특히 토마토는 어릴 때 간식으로 먹던 설탕 뿌린 토마토를 연상하게 하는 맛이어서 상큼 달콤함에 푹푹 빠져들었다. 이제 다음 숙소로 가볼까나?


 세 번째로 머물 숙소는 조용하고 한적한 어촌 한켠에 자리잡고 있다. 방에는 체크무늬 이불이 깔린 널찍한 침대와 하얀 타일을 채워 넣은 나무테이블, 미니 테라스, 대관람차 모양의 오르골과 CD플레이어도 있다. 음악을 들으며 한가하게 뒹굴거리다 사장님께 저녁 먹을 곳을 여쭤보니, 마땅치 않다고 하셔서 함덕 해수욕장으로 나갔다. 장작을 가득 쌓아놓은 피자집을 발견해 장작향이 느껴지는 갓 구운 화덕피자와 맥주를 먹고, 오는 길에는 떡볶이를 포장해와서 방에서 다정하게 먹어치웠다.




 차를 한 잔 마시려는데 전기포트가 보이지 않아 1층 공용 공간에 혹시 있나 내려가니, 다른 방 여행자들이 달아오른 얼굴로 화기애애한 수다를 나누고 있었다. 인사하니 혼자 오셨냐고 해서 "아니오 저는 남편이랑..."까지 말하니 누군가 외쳤다. "어머! 그럼 사모님이신가요?"

 깜짝 놀라 "아뇨! 저희도 여행왔어요."하자 어쩐지 너무 젊으신 것 같았다며 관심의 눈빛을 보이는 사람들. 각자 1인 여행자인 그들은 셋이서 같은 방에 묵고 있단다. 2인실은 건물에 우리 방 하나인 모양이다. 다행히 사장님이 나타나 전기주전자를 주시는 바람에 방으로 얼른 도망갈 수 있었다. 낯선 분들과의 소통도 좋지만 이번 여행의 주제는 휴식보다 더 깊은 ’안식‘이기에.


 물을 가득 채워 주신 사장님 전기포트의 스위치를 켰다. 끓인 물을 붓고 매콤달콤한 차이 루이보스티를 홀짝였다. 서핑할 때 찍힌 사진들을 다운받아 넘겨보면서. 강습을 더 받고 자유롭게 파도를 넘나들 그 날을 상상하느라, 남편도 나도 기분좋게 뒤척이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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