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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Oct 14. 2022

제주여행 4일차

9월 25일, 일요일



 찬찬히 나와 아점으로 손칼국수를 먹고, 억새밭이 아름답다는 #산굼부리를 찾아갔다. 아직 만개하지 않은 억새들이 산책로에 가득하다. 10월에 왔다면 새품, 즉 하얀 꽃의 물결을 볼 수 있었겠지만 9월 말의 억새들은 꽃이 될 가능성을 품은 쪽이 훨씬 많았다. 억새 명소로 알고 찾아간 산굼부리의 본질은 억새가 아닌 '굼부리'에 있었다.


산굼부리에서 찍은 사진.


 굼부리란 화산체의 분화구를 뜻하는 제주말. 제주에 있는 대부분의 오름(작은 화산)이 저마다 어울리는 형태의 굼부리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산굼부리는 산체에 비해 대형의 화구를 간직한 곳으로 한국에 하나뿐인 마르(Maar: 화산활동 초기에 단시간의 폭발적 분출 작용으로 생기는 작은 언덕으로 둘러싸인 화산) 형 화구다.


 굼부리 안은 현무암 자갈로 이뤄져 물이 스며들기 때문에 백록담처럼 물이 고이지 않고 온갖 희귀 식물들이 자란다고. 입구에서 10여 분만 걸어가면 정상에 올라 신비로운 장관을 내려다볼 수 있는데, 깊이가 약 100m, 지름은 600m가 넘는 웅장한 모습을 카메라에 모두 담기는 쉽지 않다. 그저 눈 속에, 최대한 담아갈 수 있을 뿐.


 

 흐린 날씨였지만 우리에겐 첫 방문이니, 억새들 틈에서 사진을 찍고 놀다가 놀멍 놀멍('천천히'의 제주도 사투리) 걸어 내려왔다.


 인스타그램으로 알게 된 #같이살자지구카페로 출발. 카페의 천국 제주에서 1일 1 카페는 들르기로 했다. 규모가 크고 직원이 많고 뷰가 멋진 곳보다는, 작지만 개성 있게 하나하나 직접 꾸려가는 카페를 좋아한다.


 오래된 갈색 알루미늄 새시문을 열고 들어서자, 기이하리만치 마음이 차분해지는 인센스 향이 먼저 마중을 나왔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다락방처럼 2층에 위치한 이 가게의 테이블 수는 3개. 처음 보는 <백년초 주스>와 드립 커피를 주문했는데, 주스는 식감이 좀 생소할 거라고 하셨다. 선명한 자줏빛에 이끌려 겁 없이 주스를 입에 가져갔는데, 순간 젤리처럼 뭉글뭉글하면서도 끈적한 느낌에 낫또처럼 딸려오는 실까지 쭈우욱.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와 알로에를 함께 갈아 마시는 듯한 보기와는 딴판의 식감. 미끌거리는 내용물이 한입에 후루룩 딸려오는 느낌이 새콤달콤한 맛과 무척 대비된다. 이상해, 이상해 하다 보면 어느새 한 컵을 뚝딱하게 되는 것도 이상했다.


마성의 식감을 지닌 백년초 주스와, 근처 빵가게의 한라봉 식빵.


 카페에서 나와 오는 길에 본 근처 빵집에 걸어갔다. #송당의아침이라는 작은 빵가게인데, 2시경 방문했음에도 빵이 별로 남아있지 않아 남은 빵 두 덩이를 샀다. 크기는 작지만 귀여운 <제주눈내린한라봉식빵>이 별미였다. 다른 식빵 하나는 성에 차지 않는 맛이라, 매장에 돌아가면 비건식빵으로 만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빵이 주식이요 업이자 빛인 사람에게는 맛이 있건 없건, 모든 빵이 아이디어의 원천이다.


 근처의 기념품 가게들을 둘러보다 #국립제주박물관으로 이동했다. 입장할 때 어쩌다 그랬는지, 일반적인 순서인 과거->현재가 아닌, 현재-> 과거 순으로 돌게 되었는데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스르는 기분이었다. 상설전시 외의 특별전시가 없어 조금 아쉬웠지만, 티켓을 주신 분이 지하에 실감영상실이 있다고 하셔서 내려가 봤다. 마침 바로 입장이 가능해서 지체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넓은 실내의 바닥이 방이라도 되는 듯 앉아있는 사람들. 바닥과 옆면이 하나로 이어져 움직이는 듯한 그래픽에 빨려 들어갈 듯 실감 나는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오랜만에 감상하는 미디어 아트라니,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다. 2편을 연이어 상영한다는 안내 방송에 한 편 더 보자고 남편을 졸랐지만, 어지러운지 나가자고 해서 툴툴대며 밖으로 따라나섰다. 전시관을 사방으로 둘러싼 야외 정원과 산책로에서 이름 모를 커다란 새를 발견해 쫓아갔는데, 새는 우리와 거리가 가까워지면 푸드덕! 날아올라 처음만큼의 간격을 다시 만들어냈다. 연못 한 바퀴를 다 돌 때까지, 좁혀지지 않는 너란 새와의 거리... 새들은 어쩜 이리 눈치가 빠를까?


 녀석과의 관계 형성을 포기하고, 저녁을 먹기까지 시간이 남아 #삼양해수욕장에 들렀다. 지자체에서 관리하지 않는, 비교적 덜 알려진 이 해수욕장의 시그니처인 검은 모래는 화산암의 오랜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다. 철분이 풍부한 모래가 관절염과 신경통에도 좋다고 해서  따뜻한 모래를 밟다가 바지를 접어 올렸다. 미지근한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해변을 걸으니, 부드럽고 폭신한 모래와 바닷물의 감촉이 마치 '여기는 제주도, 네가 모르는 세계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검은 모래가 그려내는 물결의 흔적이 아름다워 한참을 바라보다 발로 쓱쓱 그림도 그려보았다. 금세 투명하고 잔잔한 파도가 밀려와 그림을 사르르 지워내며, 부질없음을 속삭인다.



 

 꿈같은 한 때를 지나 남편이 가보자던 백종원 아저씨의 중식당- #도두반점에서 짬뽕과 자장면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나설 때 내추럴 인센스를 피우고 문을 닫아놓은 숙소에는 다행히도 퀴퀴한 냄새가 사라져 있었다.


 두 개의 침대로 꽉 찬 공간에는 앉을 만한 자리가 없기에, 이 날도 화장실 문을 닫고 양변기 뚜껑 위에 앉아 명상을 했다. 휘이잉, 환기팬 돌아가는 소리. 열악한 상황이니 구루님들도 양해해주시겠지. 눈을 감으면 오늘 하루와는 또다른 공간이 펼쳐진다. 삶이라는 꿈에서 잠시 깨어나는 시간이다. 옴, peace,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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