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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Oct 18. 2022

제주여행 D+2일차.

9월 24일


 

 오전에 숙소 지하의 웰니스센터로 내려갔다. 목이 말랐다. 혹시 물이 없냐는 내 말에 요가 강사님은, 원래 드리는 건 아닌데...라고 하시면서 수줍게 생수 한 병을 주신다. 여행 중 요가 클래스는 처음인데다 오랜만의 그룹 요가에 설렜는데, 작은 친절에 기분좋은 설렘이 커진다.


 평소에 집에서 스트레칭 수준의 가벼운 요가나 인요가를 한다. 멋진 동작을 완성하기보단 잡생각과 긴장, 뭉친 곳을 없애려고. 혹시 힘든 동작을 하시면 어쩌지… 다행히 강사님은 참여자들의 수준을 빠르게 파악해 쉬운 동작을 이어가셨다. 수련장 테라스 위로 보이는 하늘과 편안한 움직임에 굳은 몸이 슬슬 풀린다. 쟁기자세와 어깨서기를 하면서 남아있던 피로마저 떨어져나갔다.


 방에서 씻고 1층으로 내려왔다. 그래놀라와 과일을 올린 그릭요거트와 주스 또는 커피 한 잔이 조식으로 제공된다. 차에 짐을 싣고 오겠다는 남편에게 커피? 주스? 물어보니 주스. 그럼 저도 주스 주세요-


 

 요거트와 그래놀라를 음미하며 콧노래를 부르는 나와 달리, 남편은 어머님과 통화를 하느라 먹는 둥 마는 둥이다.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할 수 있는 나와, 여러 일을 동시에 신경쓰고 생각하는 그. 이렇게 다르니 균형을 잡고 살 수 있는 거겠지?


 그에게 오늘은 빈티지 옷가게를 구경하자고 했다. 제주도까지 와서 왜 옷을 구경하느냐는 말에, 제주도니까 더 구경해야 한다고 정색했다. 내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실용적이고 남는 물건은 옷과 그릇이다.

 주차가 어려운 지역이라 유료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제주에서 제일 많은 빈티지 옷을 보유하고 있다는 #에브리바디빈티지에 들어갔다.

 짙은 갈색의 윤이 나는 나무 바닥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분 좋게 삐걱거린다. 젠더 뉴트럴이 트렌드이긴 하지만 넉넉한 사이즈의 남성복이 압도적으로 많아보여 여성복 위치를 직원분께 여쭈니, 캐주얼하게 입을 수 있는 몇 벌 빼고는 따로 마련된 여성복 매장에 있다고 하셨다. 나가서 100m쯤 걸으면 발견할 수 있는 매장에서 어깨와 팔꿈치에 구멍이 뚫린 후드티를 살까 말까 고민하다 나왔다. 요즘 옷을 들고 거울 앞에 서면 생각한 이미지와 전혀 다른 모습의 사람이 있다. 예상보다 너무 짧게 잘린 머리가 소년같은 이미지를 한껏 부각시킨다.


 맞은 편에 빈티지 유니폼 매장도 따로 있다고 해서 일단 구경한다. 축구 선수들의 유니폼이 대부분이었는데, 통풍이 잘 될 것 같으면서도 실키한 촉감과 화려한 색상이 많다.

"원래 유니폼은 이렇게 비싸?"

 가격대가 생각보다 높아 남편에게 물으니 좋아하는 팀, 선수, 년도를 모으는 사람도 있고 한정판이니 그렇지 않겠냐고. 빈티지 옷을 입어보고 싶은 욕심과 달리 마음에 드는 옷은 찾지 못해 아쉬워하며 점심을 먹으러 갔다.



"렌틸콩 슾입니다."


 아랍 레스토랑인 #아살람에 들어가서 앉자마자 직원분께서 따뜻한 스프를 주셨다. 입안에서 뽀스스 으깨어지는 비스킷처럼 고소한 맛에 메인 음식에 대한 기대감이 커진다. 샐러드 갈릭 후무스와 쿠브즈(빵), 치킨 케밥을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아랍인(으로 보이는) 손님들이 단체로 들어왔다. 무슬림이 기도할 수 있는 기도실도 있어 아랍인들이 마음 편히 찾는 듯 했다. 하루 5번의 기도를 하는 무슬림의 예배 시각은 매일 조금씩 다르다.


한 입 떠먹은 후무스와 치킨 케밥(다진 닭고기를 숯불에 구운 요리)


 기다렸던 후무스는 예술적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만큼이나 맛있어서 싹싹 긁어먹으며 일부러 찾아온 보람을 느꼈다. 계산대 근처에 있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한국이슬람교 펴냄)' 라는 무료 소책자도 한 권 조용히 득템.



 

 소화도 시킬겸 걸어서 독립서점을 찾아가다 먼저 그 왼편의 #클래식문구사에 들렀다. '연필 깎아 드립니다' 라는 문구가 쓰여있는 미닫이문. 시중에서 보기 힘든 각종 연필과 고무지우개, 노트, 문진, 엽서 그리고 빈티지 그릇과 수입 간식까지 주인의 취향이 한껏 드러나는 상점이다. 은은한 연필 냄새를 맡고 테스트하다보면, 하루종일 머물 수 있을 듯한 공간. 수많은 문방구를 보니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도 솟구쳤다. 연필에 문구를 각인해주는 서비스가 있어 영문 이름을 써서 냈더니 옆에 있던 남편이 창피하다며 장난을 쳤다.


"누가 그런 데 자기 이름을 새겨."

"왜, 나도 작가야. 글 쓸 때 이걸로 써야징."


 각인하는 동안 잠시 옆에 있는 서점에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리고, 독립서점 #이후북스에서 책 한 권을 골라 나왔다. 서점 밖에서 기다리던 남편이 갑자기 좋아할만한 곳을 알아냈다며 손을 이끈다. 가로로 길고 세로폭이 몹시 좁은 청록빛의 건물을 가리키면서. 처음에는 건물이 맞긴 한지 의심스러웠다.



 "저기 사람이 들어갈 수 있어? 건물이 맞아?"


 여자 혼자서 지나다니기도 벅찬 너비를 가진 독특한 가게의 이름은 #모퉁이옷장. 특히 난간도 없이 2층으로 통하는 좁은 계단이 무서워서, 몸을 최대한 벽에 붙이고 조심스레 올라갔다. 2층 에어컨의 찬바람 공격에 다시 1층으로 내려왔는데 행거 옆에 바로 서면 답답한 느낌이 들어, 몸을 45도 기울여 걸으니 안심이 됐다. 겉보기와는 달리 빽빽하게 걸린 옷들이 하나의 대형 옷장을 연상시키는 곳. 몸이 낀 듯한 공간에서 옷을 뒤지는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이란. 결국 여행하면서 입을 얇은 셔츠를 하나 건졌다. 이 옷을 볼 때마다 제주가 떠오르겠지?


  다시 문구사로 돌아와  금빛으로 각인된 연필을 찾았다. 이제 귤밭 뷰가 좋다는 #카페두갓으로 출발~


 이런 데 과연 카페가 있을까 싶은 외딴 지역의 목적지에 도착하자 자갈 깔린 길이 나왔다. 주차 공간이자 카페두갓의 사유지라는 팻말이 부럽다. 근처에는 기둥에 묶인 말 한 마리가 같은 공간을 빙빙 돌고 있었다. 카페의 말일까?

 시원한 키와 말투에서 개성이 느껴지는 사장님께 청귤에이드와 커피를 주문하고 뒷문 쪽으로 나갔다. 키 작은 나무들이 청귤이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익으면 싱그러운 빛깔이 얼마나 예쁠지 상상만으로도 흐뭇하다. 제주 날씨가 대체로 그렇듯 흐린 날이었지만 사진도 찍고, 주먹만한 귤이 달린 하귤나무도 신기해하며 실내로 들어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귤밭을 감상하며 달지 않은 에이드를 쭉쭉 비웠다. 낮은 컵의 높이에 맞게 빨대를 잘라주신 게 티가 나서 더 좋았다.



 오늘부터 이틀간 묵을 숙소는 예약한 곳 중에서 가장 저렴하지만, 무려 널찍한 침대 2개와 TV도 있다. 파격적인 가격임에도 리뷰가 좋아 기대감을 가지고 방문을 열었다. 분명 모던해보이던 사진과 닮았는데, 뭔가 이상하다. 오래된 여관 냄새가 코를 찌른다. 허허. 인센스라도 사다 피워야겠네.


  저녁은 #롤타이드라는 타코 가게에서 먹었다. 핑크빛 일몰을 반영하는 잔잔한 조수의 흐름이 보이는 해변 앞 가게. 돌돌 말리는 듯한(Roll) 밀물과 썰물(tide)을 나타낸 듯한 가게 이름이 자못 낭만적이다.



 돌아오는 길에 소품샵을 검색해서 내추럴 인센스를 사고, 맞은편 약국에서 식염수를 구입했다. 어제부터 목과 코 사이가 답답해 코세척을 하고 잘 생각이다. 식염수통으로는 힘들 것 같아 근처 슈퍼에서 케찹통을 샀다. 식염수를 넣고 써보니 딱이다.


 저렴한 숙소에 값비싼 인센스를 피우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느끼며, 낮에 산 책과 물건들을 다시 꺼냈다.


밧줄 모양의 내추럴 인센스와 물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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