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ujin Oct 22. 2022

제주여행 D+1일.

9월 23일


  새벽에 조금이라도 자야 할 것 같아 혼자서 선박의 이코노미실로 갔다. 차가운 바닥에 공기까지 서늘한 공간은 가져온 광목 담요로는 턱없이 춥다. 배가 방향을 바꿀 때마다 회전하는 느낌과 진동이 온몸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드르르르르르르... 막 잠들려는 찰나, 떨어진 곳에서 주무시던 아저씨가 일어났다. 탱크처럼 코를 골던 그는 갑자기 양말이라도 갈아 신는지 어둠 속에 술냄새와 발 냄새와 나프탈렌 냄새가 동시에 났다. 오 신이시여!


  언제 잠들었을까. 바깥에서 조금씩 어수선해지는 소리. 텀블러와 담요를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남편이 아까의 자리에 그대로 있다.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핸드폰을 보면서. 잠시 후, 차를 가져온 승객들은 갑판으로 나와달라는 방송에 우리 차를 찾아 안에서 기다리니 순서대로 출차를 시켜 주신다. 나와서 시계를 보니 새벽 6시가 조금 넘은 시각. 아침을 먹으려고 봐둔 #김희선제주몸국은 7시 오픈인데. 일단 가볼까?


 


 가게 앞 텅 빈 주차장에 차를 대고 시트를 뒤로 젖히니 안에서 영업 준비로 분주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저분들 우리 되게 신경쓰이시겠다."

"그러게."


 영업시간 전에 찾아와 기다리는 손님은 밖에서 가만히 계신다 해도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닌 걸 매장을 운영해본 사람은 안다. 잠시 후 다른 차들이 주차장에 속속 들어왔고 막무가내로 식당에 들어가는 분들도 보였다. 우린 7시 넘어서 들어가자.


배에서 막 빠져나와 일단 내비게이션을 찍었다. 제주에서 먹은 첫 음식, '몸국'.


 제주도 향토 음식인 '몸국'은  돼지고기 삶은 육수에 불린 모자반을 넣고 끓인 국이다. 원래 잔칫날에나 먹던 탕류로 맛이 기름지면서도 부드러운 데가 있다고 한다. 몸국에 들어있는 모자반은 오독오독 씹히는 맛이 있으면서도 바다내음이 물씬 났다. 고기 육수 탓인지 낯설어 반 이상 남겼지만 몸은 훗흣해졌다.


 이른 오전에 갈만한 곳이 또 어디가 있지. 맞아. 스타벅스!

 #스타벅스제주용담DT점은 현무암 해안과 함께 공항에서 뜨는 비행기들도 볼 수 있는 뷰 맛집이다. 나는 제주에만 있다는 <제주까망라떼>(흑임자라떼)를 두유로 변경하고, 남편은 변함없이 자바칩프라푸치노를 주문. 제주의 스타벅스에는 테이크아웃 시 다회용 컵을 1000원에 이용하고 추후 반납기에 넣으면 보증금을 환불받는 시스템이 있다. 전국에서 카페 밀집도가 가장 높은 제주는 청정 지역임에도 일회용 컵의 배출이 심각하다는데, 다회용 컵 시스템이  널리 정착되기를.



 일정 앱에 띄엄띄엄 적은 메모를 보며 어딜 가면 좋을지를 검색했다. 그중 눈에 띈 곳, #환상의숲곶자왈.  9시 해설 투어가 있다고 해서 예약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일 검색해서 찾아간 곶자왈은 이번 여행에서 매우 기억하고 싶은  장소가 되었다. 곶자왈의 '곶'은 숲, '자왈'은 돌이 많은 땅을 뜻한다. 돌무더기로 인해 농사를 짓지 못하니 땔감을 얻거나 숯을 만들던 버려진 땅으로, 일부러 흙을 뿌린 산책로를 빼면 보드라운 흙은 찾아볼 수가 없다.


 용암이 분출되어 흐르며 남긴 현무암 위로 뻗은 나무들과, 타잔과 침팬지가 나올 듯한 덩굴들이 길게 내려온 원시림! 나무들은 바람에 쓰러지지 않으려고 돌을 잡고 버티다 보니 뿌리가 근육처럼 울끈불끈 발달해있다.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은 그 뿌리를 밟지 않으려고 사뿐히 걷는다. 필요에 따라 연리목이나 연리지가 되기도 하고 사람을 피해 방향을 꺾기도 하며, 서로 힘겨루기도 하는 식물들의 생태 이야기가 인간사와 닮아 울컥하는 순간도 있었다. 해설사님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셨다.


 예전에 이 불모지를 상속받아 평당 300원에 팔았었다고. 그 후 어느 날, 잘 나가던 남편이 젊은 나이에 뇌경색으로 은퇴하면서 다시 이곳을 사들이자고 했단다. 평당 10000원대에. 남편은 맨손으로 길을 만들고 숲을 가꾸면서 거짓말처럼 병이 다 나았다. 육지에서 직장을 다니다가 도와주러 온 딸은 한두 달로 될 문제가 아님을 깨닫고 제주도에 정착했다. 숲의 원형을 보존하면서 지키고 가꾸는 일이 가족의 연결 고리가 되고, 생계의 터전이 됐다.




 아름다운 숲을 자꾸 뒤돌아보며 아쉬워하는 나와 달리, 주차장으로 가는 남편의 기분은 계속 좋지 않아 보였다. 곶자왈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님이 잠긴 목소리로 코로나 바이러스에 확진되었다는 전화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노모와 노부를 모시는 데 책임감이 투철한 아들이다. 괜히 여행을 왔다며 다신 안 올 거라고 내뱉는 말에 내심 서운했지만, 바다를 보면 기분이 나아질 거라며 내비게이션에 #협재해수욕장을 찍었다. 언젠가 SNS에서 환상적인 협재 사진을 본  이후 제주도=협재라는 공식이 뇌리에 박혀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협재에 도착하기 바로 전 #금능해수욕장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운전하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금능해수욕장으로 들어간다.


"여긴 협재가 아니라 금능해수욕장인데?"

"어. 그냥 와보고 싶어서."


금능해수욕장에서.


 처음 가본 금능해변의 물빛은 신혼여행 때 지중해에서 본 바다를 연상시켰다. 옅은 레몬색과 멜론색, 에메랄드색과 민트색, 청남색이 뒤섞인 오묘한 색깔들. 9월 말인데도 바람은 훈훈해서 가벼운 물놀이나 일광욕을 즐기는 외국인들도 보였다. 남편이 오래도록 물멍에 빠진 동안, 해변 끝에 조성된 야영지를 구경하고 산책로도 걸었다. 너무 길어서 끝까지 가진 못했지만.

협재로 가볼까?



협재해수욕장

 

 쌍둥이 해수욕장임에도, 훨씬 유명한 협재에는 주차장에 거의 자리가 없었다. 여유가 묻어나는  금능해수욕장과 달리 협재에는 단체나 가족 단위로 놀러 온 사람들과 곳곳의 함성도 많다. 조금 기분이 풀린 남편과 넓게 깔린 현무암 위를 걸으며 멀찍이 보이는 비양도를 바라봤다. 금능과 협재는 마치 금빛 머리칼에 자유로운 기질을 가진 막내와, 하는 일은 많지만 그만큼 대접받는 형을 떠오르게 한다.


 잠이 부족한 탓에 오전이 더디 흐른다. 체크인인 4시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몇몇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컨디션을 끌어올려줄 제주산 꿀과 귤말랭이를 사서 차에 돌아오니 쉬고 있던 남편이 갑자기 어딘가로 향한다.


"우리 어디가?"

"나도 몰라. 좀 특이한 데가 있어서."


알작지에서.


 20분쯤 달려서 자갈이 가득한 아니 자갈로 꽉 찬 어느 해변에 도착했다. 명칭은 #알작지. 동그란 돌의 모양에, 돌멩이를 뜻하는 '작지'라는 제주도 말을 더한 이름이다. 한라산 계곡에서부터 부서진 바위 조각들이 오랜 세월 동안 이곳까지 운반되고 파도에 다듬어져 동글동글한 자갈밭을 이룬다. 자연이 어루만진 색색의 몽돌을 보며 하나 집어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제주도의 돌을 외부 지역으로 반출하는 것은 불법이다. 곳곳에 크고 작은 해변이 있고 저마다 특징이 달라, 찾아가는 재미가 있는 제주의 매력에 하나둘 눈뜨기 시작한다.


  가고 싶었던 비건 베이커리에 들러 구경하다가 '쑥그래놀라'를 한 봉지 사고, 숙소 앞에 도착했다. 4시 체크인인데 아직 1시간이나 남았네... 먹을 게 없나 주변을 산책하다가 다시 돌아와 겨우 열쇠를 받았다. 방에 들어와 씻고, 잠옷을 입고서 율무차를 한 잔 마시려는데 머그잔 속이 끈적거린다. 컵을 바꾸러 다시 옷을 갈아입고 로비에 다녀오니, 남편은 앉아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오빠 뭐해? 안 자?"

"지금 자면 망해. 그냥 내일 되는 거야."

"조금이라도 일단 자고 일어나서 제주 동문 야시장 구경 가자. 거기 먹을 거 많대."

"그런가...?"

"깨워줄게~!"


  알람 설정 : 4시간 30분.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피로와 싸워 겨우 다시 일어났다. 야시장에 도착하니, 쿵쿵대는 음악에 불쇼를 연출하면서 음식을 만드는 청춘들을 구경하는 인파에 입구부터 발을 디딜 틈이 없다. 축제 같은 분위기에 정신이 번쩍 든다. 남편을 만나 함께 푸드트럭을 운영했던 날들이 떠오르는 광경이다. 누군가 여행하며 돈을 쓸 때 누군가는 진땀 흘려 돈을 벌지. 그때 참 힘들고 재미있었는데. 저분들은 나중에 무슨 일을 하게 될까?

 비교적 줄이 없었던 우도땅콩아이스크림과 한라봉아이스크림을 샀다. 허기 속에 달콤하게 녹아내리는 고소함과 상큼함. 뭐야, 둘 다 엄청 맛있잖아!


 제주 도심의 야경을 보며 돌아오는 길, 배고픈 오빠는 맥도날드에서 빅맥세트를 샀다. 바야흐로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여행 D-da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