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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엘 Apr 20. 2024

방구석 여행가

한가로움

1842년 뉴욕, 엄청나게 부유한 가정에서 엄청난 천재가 태어난다. 윌리엄 제임스다. 


화가가 되고 싶었으나 재능이 없어, 그냥 하버드대에서 화학을 공부한다. 


화학에도 소질이 없어, 그냥 하버드에서 의학을 공부한다. 


그마저도 흥미가 없어 훌쩍 아마존으로 여행을 떠난다. 


아마존에서 돌아온 그는 심리학, 철학, 종교학으로 관심을 옮긴다. 


나중에 하버드에서 심리학을 가르치고(미국 대학 최초다) 철학도 가르쳤다. 


미국산(産) 철학이랄 수 있는 ‘실용주의(프래그마티즘)’의 창시자이면서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으로 종교학에

도 큰 업적을 남겼다. 



과학에서 인문학으로?


8개월 간의 아마존 여행이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어떻게?


모른다. 


다만, 다른 장소에 가면 다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해서, 마음의 발걸음이 몇 발짝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것이라 추측할 뿐. 


알랭 드 보통 역시 ‘여행은 생각의 산파’라고 말했다. 


반대로 피카소는 방구석 여행가다. ‘나는 머릿속에서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그 정도 명성이면 온 세상을 누빌 수 있었겠지만 스페인과 프랑스만 왔다갔다 했다. 


내가 좋아하는 여행은 한가함이다. 


한가로운 사람만이 주인 없는 산, 숲, 바람, 달을 누릴 수 있다. 


빡빡한 일상 속, 두 세 시간의 한가함을 누리기 위해 아내와 서귀포 자연휴양림에 왔다. 


녹색의 농담(濃淡)이 절정에 이른 숲은, 초봄과 늦봄이 교차하는 요즘에만 누릴 수 있는 호강스러운 미학이다. 


하나하나 나무들 이름표를 입에 새기면서 걷는데, 저 멀리 이름표에 ‘너도밤나무’가 얼핏 보인다. 


가까이 가니 ‘나도밤나무’다. 



아무도 없는 숲에서 아내와 나, 10대 시절 소년 소녀처럼 깔깔대고 웃었다. 


조금 더 가면 ‘우리도밤나무’도 있는 거 아냐, 라면서 한 번 더 웃었다. 


젊은 날, 1년에 두 세 번은 혼자 배낭 메고 훌쩍 제주로 와, 제주도 해안가를 돌고 돌았었다. 


올레길이 생겨 해안가가 북적북적해지자, 한라산으로 들어가 길 없는 숲을 헤매고 다녔었다. 


죽을 위기도 몇 번 넘겼지만, 아주 꿀맛이었다. 


지금은? 


아내가 있으니 택도 없는 일. 


결혼해서도 총각 때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는 건, 양아치다.  


여행 스타일도 피카소 스타일로 바뀌고 있다. 


가족과 함께 먹는 소박한 밥상이 천하진미라고 했던 추사처럼, 아내와 걷는 산책이 가장 즐겁다.  


(그냥 끝내기 섭섭하니 윌리엄 제임스 말을 하나 인용한다. "현명하다는 것은 무엇을 무시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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