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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ero Jul 29. 2021

오빠는 나 이러려고 만나?

짐승 같은 인간과 연애했다

입 밖으로 꺼냈을 때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몇 가지 말이 있다.


“나 뭐 바뀐 거 없어?”
“변했어. 나 사랑하긴 해?”
“이러려고 나 만나?”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비참하게 만드는 이런 말 중 “오빠는 나 이러려고 만나?”에 대한 이야기다.


 그 자식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러려고’ 날 만난 게 분명하다.

 달콤한 말로 사랑을 속삭였지만, 그 안에 진짜 사랑과 존중은 없었다. 그가 펄쩍 뛰며 아니라고 손사래 칠 것이 분명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우리의 연애는 나 혼자 하는 짝사랑이나 다름없었고, 나는 그에게 그냥 데리고 다니기 좋은 트로피이자 성욕을 풀어줄 장난감 같은 존재였다.


 분명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다고 해도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러지 않으면 지난 10개월간의 내가 불쌍하기 때문이다.





 태선과는 졸업한 선배들이 찾아와 성공담을 풀어주고 술자리를 갖는 ‘홈커밍 데이’에서 처음 만났다.

 로스쿨 신설로 마지막 법대생이 된 나는 졸업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다. 얼마 남지 않은 사법고시를 봐야 할지, 아니면 그냥 회사에 취업해야 하는지, 로스쿨 입학 준비를 해야 할지. 솔직히 더 공부하기엔 지겹기도 했다.

 그 자리에 사법고시에 얼마 전 합격해서 연수원 생활을 하고 있던 그가 나타났다. 나보다 네 살 많은 선배였다.


 사실 별생각이 없었다. 그냥 대단해 보였다. 그게 전부였다. 

 그가 남자로서 매력적이거나 저런 사람과 연애를 하고 싶단 생각은 하나도 안 했다. 먼저 말을 걸고 전화번호를 물어온 쪽도 태선이었다. 그냥 알아두면 좋을 것 같은 잘나가는 선배로 생각했다.


 그날 이후, 그는 밥을 사주겠다, 커피를 사주겠다, 드라이브를 시켜주겠다는 갖가지 이유를 들며 빨간 제네시스 쿠페를 몰고 교문 앞에 나타났다.

 적극적인 애정 공세에 나도 서서히 스며들어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귀자는 확언은 없었지만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애를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그는 일부러 그 확언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연애는 나 혼자 했는지도 모른다.


 근사한 레스토랑에 데려다줬고, 전망이 멋진 호텔에 가 보고, 수영장이 딸린 스위트룸도 가 봤다. 내가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좋은 음식을 먹고 멋진 장소에 갔다.


 그는 나에게 신용카드를 줬다. 가방이나 옷도 사고 피부과에 다녀도 되고, 친구들과 밥 먹을 때도 쓰라고 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을 줄 안다고, 나는 그런 데에 돈 쓰는 것, 특히 남의 돈을 쓸 줄 몰라서 그 카드로는 딱 한 번, 친구와 커피를 마시며 “남자 친구가 사주는 거야.”라며 15,000원 정도 긁은 게 전부였다.


 내가 카드를 쓰지 못하니 태선이 직접 나를 끌고 백화점에 갔다. 

 몸에 딱 달라붙어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원피스나 높은 하이힐을 골라 줬다. 도저히 내 옷장에는 없을 법한 옷이 채워져 갔다. 남사스러울 만큼 가슴이 깊게 팬 원피스, 속옷이 보일 것처럼 위태롭게 짧은 치마, 속옷 라인이 비칠 만큼 딱 붙는 핫팬츠.

 그 전 남자 친구는 내가 반바지 입는 것도 남들이 본다고 싫어했는데, 태선은 내가 긴치마를 입는 걸 남들이 보기에 별로라며 싫어했다.


 내 키는 170cm이다. 그의 말로는 본인 키가 172cm라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170cm도 안 되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를 만날 때엔 일부러 굽이 낮은 구두나 운동화를 신었는데, 그는 기어이 나에게 높은 하이힐을 신겨서는 나의 팔받침이 되기를 자처했다.


 점점 내 외모에 대해 바라는 게 많아졌다.

 단발머리보다는 긴 생머리가 좋다며 본인 카드로 미용실에 가서 40만 원이나 하는 붙임머리를 하고 오라고 했다. 허리 라인은 너무 예쁜데 가슴이 아쉬우니 가슴 수술을 받아보면 어떻겠냐고도 했다. 비용은 본인이 반을 대주겠다고. 손톱은 항상 길고 화려하게 샵에서 관리받기를 원했고, 같이 밤을 보내고 난 다음 날 아침이면 내가 먼저 일어나서 화장하고 옷을 빼입은 채 그를 깨워주길 바랐다.




 우리는 주로 호텔 데이트를 즐겼다. 내가 바란 바는 아닌데 자꾸 그 빨간 차의 목적지가 호텔이었다.


 하이힐에 화려한 원피스를 차려입은 나와 멋진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호텔에 가는 게 우리 데이트의 전부다. 어딘가에서 산책하고 싶어도 발이 아파 걸을 수도 없다.

 진지한 대화나 내 고민을 말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입 밖에 꺼내기도 전에 그가 입술로 다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한순간도 참기 어렵다고 말했지만, 나는 정서적 교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그와 대화할 시간만 갈구했다. 하지만 대화를 시도할라치면 그는 바로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부산에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호텔 수영장에서 또 패션쇼를 하듯 야한 비키니를 입어야 했다. 그리고 방에서는 또 어떤 대화도 나누지 못한 채 잠에 빠진 태선을 바라만 봐야 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뭘까? 연인 사이라는 건 나만의 착각인가?


 손대선 안 될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그의 휴대전화를 들고 침대 구석에 앉아 몰래 잠금을 해제했다. 문자 메시지 함을 슬며시 눌렀다.


7시까지 역삼동 XX 오피스텔 1203호로 오시면 돼요.


 내가 아무리 어리고 뭣도 모른다지만 저 문자 메시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머저리는 아니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이 짐승 같은 인간의 욕구는 끝이 없구나. 너무 더러워서 서울에 가면 바로 산부인과에 가야지.’ 생각했다.


그다음 메시지도 확인했다.


어제 XX 클럽에서 만난 김태선 변호사예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언제 또 볼 수 있어요?


 모자란 놈, 그 마저도 씹혔네.

 가진 거라곤 변호사 타이틀밖에 없는 새끼. 아니, 아직 연수원에 있으면서 무슨 변호사? 너는 대체 몸과 시간이 남들보다 얼마나 더 많은 거니?


유현: 뭐하냐
태선: 주연이랑 부산 왔다
유현: 쓰레기 새끼 ㅋㅋ 그래도 이번엔 오래 만나네
태선: 데리고 다니기 좋잖아 ㅋㅋ 착하고.
유현: 그러다 발목 잡혀서 결혼하자고 하면 어떡하냐?
태선: 에이, 결혼은 안 하지. 난 열쇠 세 개는 받아야 돼. 집 키, 차 키, 사무실 키. 대충 놀다가 잘 사는 여자 만나서 결혼해야지 ㅋㅋ


 나는 저 메시지를 다 보고도 헤어질 생각을 못 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내가 이걸 봤다는 티가 나지 않을까 고민했다.


 헤어지고 난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사과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저 더럽고 추잡한 인간이 뭐길래 이렇게나 지리멸렬했는지! 안타깝게도 나는 그를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한 나머지 모른 척 눈을 감아 버렸다.


당장 깨워서 “오빠, 나 이러려고 만나?”라고 쏘아붙였어야 했는데.





 결국 그와 헤어지게 된 건 내 마지막 자존심 때문이었다.

 저런 메시지를 보고도 모른 척할 만큼 내 자존심은 이미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면서 뭐가 남았냐고 묻는다면 ‘나에게 잘해주는 변호사 남자 친구’라는 타이틀에 걸린 쌀 한 톨만큼의 알량한 자존심이라 할 것이다.

 내가 사랑한 건 변호사 태선이 아닌 인간 태선이었는데, 그가 인간이길 저버렸으니 가진 거라곤 변호사 간판 하나만 빈 껍데기처럼 너덜너덜하니 남았다.


 그는 결국 그마저도 스스로 저버렸다.

 하필 나에게 아프다고 일찍 잔다던 날 밤, 내 친구 혜민이 청담동의 한 바에서 그를 목격했고, 그 길로 분주히 눈으로 태선의 뒤를 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만 알려던 사실을 이제 내 친구까지 다 알아버린 이상, 이보다 더 바보가 될 수는 없어서 이제 정말로 그만하자고 말했다.


 그제야 나는 10cm짜리 하이힐에서 내려왔고 힙합 바지를 입는 나를 되찾았다.


 애인의 ‘사’자 타이틀 따위 이제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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