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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ero Aug 02. 2021

영수증에 내 전화번호를 휘갈겨 썼다

저희 술 한 잔 할래요?

 친구 셋과 제주에 사는 해솔을 만나러 갔다. 해솔은 제주로 이사해서 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 넷은 카페테라스에 앉아 이따금 밖을 바라보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폭우로 수문이 열린 팔당댐처럼 햇볕이 마구 퍼붓고 열기가 팔에 다 전해져도 우리는 별것도 아닌 이야기들로 배를 잡고 웃었다.


 카페 출입문 앞에는 한 남자가 골목 어귀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흰 폴로셔츠를 입은 너른 어깨의 뒷모습. 또 호들갑을 떨며 “야 저 남자 되게 핫하다!”를 외치니 “어디? 어디?”하고 여덟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바깥을 향한다.


 그 남자가 뒤를 돌아봤는데… 완전 내 스타일!

 그래서 또 “저 남자 진짜 내 스타일이야.”하고 보니 그 남자가 우리가 있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 친구와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이 아닌가.


 두근거리는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갑자기 해솔이 카페 영수증을 쭉 찢고 가방에서 펜을 하나 꺼낸다.


 “여기 전화번호 써. 주고 와.”


 남자 친구가 있는 해솔은 자꾸 우리더러 “솔로들은 더 놀아야 해. 남자 더 많이 만나고, 핫한 사랑 좀 해라 좀! 쉬지 마!”하며 애원하듯 외쳤다.

 우리가 해 주는 시시콜콜한 연애담이나 놀러 다닌 이야기를 듣는 걸 너무 좋아해서 매일 우리더러 쉬지도 말고 잠도 자지 말고 놀라고 했다.


 “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 창피해. 어떻게 그래!”

 “너넨 지금 제주도에 여행 온 거잖아. 저 사람이 서울 사람인지 제주 사람인지 광주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연락이 오면 좋은 거고, 아님 마는 거잖아. 다시 못 볼 사인데.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할 거면 하고 후회하자. 빨리 전화번호 써서 주고 와.”


 우물쭈물 영수증 뒷면에 조그맣게 내 전화번호를 쓰고 있는데 또 불호령이 떨어진다.


 “전화번호 글씨 너무 작잖아! 크게 써!”


 작게 쓴 번호 위에 두 줄 죽죽 긋고 그 아래 조금 더 크게 내 전화번호를 썼지만, 이번에도 너무 글씨가 작고, 뒷배경의 회색 글씨들에 내 숫자가 잘 보이지 않는단다.

 할부 거래 계약서의 약관이 어떤 거고 SK는 친환경 영수증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따위의 한 번도 읽어본 적 없지만, 꽤 의미가 있을 줄글들 위에 한 번 더 두 줄을 죽죽 긋고 그 아래 다시 쓰렸는데..


 “아냐, 거기다 줄 긋고 다시 쓰지 마. 없어 보여.”


 이번엔 아예 자기가 읽던 책 맨 뒷장 커버를 찢어서 준다.


 이번만큼은 해솔에게 혼나지 않으려는 굳은 결의로 또박또박 큰 글씨로 내 전화번호를 적었다.

 만족하는 친구들의 표정을 보며 “밑에 멘트 뭐라고 쓸까?” 하고 있던 찰나 그 남자가 나가려는 것이 아닌가!

 잠깐 담배를 태우러 가나 싶었는데 친구와 함께 앞에 세워 둔 차에 폴짝 올라탔다.


 친구들의 호들갑과 이번만이 기회라는 생각에 나도 바로 의자를 박차고 뛰어나가서 다급히 차의 조수석을 두들겼다.

 스르르 창문이 내려가자 화들짝 놀란 두 남자가 보였다.


 “저, 여기 놀러 왔는데요. 혹시 시간 되시면 같이 술 한잔하고 싶어요!”


 그 남자가 웃으며 “네. 시간 돼요. 연락드릴게요.” 하고 사라졌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근두운에 탄 것처럼 사뿐사뿐 날아 돌아오니, 세 개의 입이 동시에 “뭐래?”를 외친다.


 “맥주 마실 생각 있대! 연락한대!”


 여덟 개의 손이 손뼉을 치고 그때부터 우리는 하염없이 내 휴대전화가 울리기만 기다렸다.





 ‘카톡’


 그 남자다. 인사를 하고 먼저 말 걸어줘서 고맙다고 한다.

 저녁에 시간 되면 보자고, 친구 몇 명이 있냐 하기에 네 명이라 하려다가 해솔이 손사래를 쳐서 셋이 있다고 했다.

 자기들도 세 명이 왔는데 그럼 같이 밤에 맥주 한잔하자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해솔은 빨리 집에 가서 화장부터 고치고 있자고 본인이 더 난리였다.


 프로필 사진을 눌러 뭐가 있나 봤는데, 일단 보통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하운드 독과 함께 산책하는 사진에서 본인의 멋짐을 한 번 뽐내고 있었고, 다른 사진들엔 람보르기니 핸들을 찍은 사진부터 지바겐과 같은 고급 외제 차를 뒤에 줄줄이 세워놓고 명품 옷을 휘감고 모여있는 남자들과의 우정 사진이 있었다.


 혜리는 그걸 보고 ‘돈 많고 사람 함부로 대하는 양아치들’ 같아서 영 내키지 않는다고 했고, 서희와 해솔은 아무렴 뭐 어떠냐 했다.

 어쨌든 내 소심한 마음에 불을 지핀 해솔 덕에 난생처음 용기를 냈고, 그 용기가 통했다니 기분이 여간 좋을 수 없었다.


 해솔의 집에 가서 어떤 옷으로 갈아입을지 고민하며 커피잔을 쟁반 위에 올리고 영수증을 구겨 버리려는 순간, 해솔이 내 손을 탁 잡았다.

 “그거, 버리지 마.”

 일제히 해솔을 의아한 눈으로 보자, 해솔이 말했다.


 “주머니에 챙겨 놔. 그리고 이따 만나면 ‘아직도 이게 주머니에 있었네’ 하면서 보여 줘.

 네가 그 남자를 보자마자 꽂혀서 번호를 어떻게 줄지 엄청나게 고민했다는 흔적이라고 보여 줘야지.”


 해솔은 이성에게도 동성에게도 인기가 많다.

 새삼 그녀처럼 마성의 매력을 뽐내려면 이런 사소한 이벤트 하나에도 의미를 다 부여하고 살아야 하는구나 싶어서 무릎을 탁 쳤다.





 해비치 호텔에 머물고 있으며 친구가 도착하면 연락하겠다던 그 남자는 우리가 해솔이 집에서 화장을 다 하고 앉아 드라마 한 편을 다 끝낼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못 볼 것 같으면 그렇다고 말해주면 우리도 우리끼리 나가서 술을 마시든 배달을 시켜 먹든 할 텐데, 내일 아침 돌아가는 비행기 시간은 다가오고 날을 점점 더 어둑해졌다.


 “그새 다른 여자들이랑 헌팅한 거 아닐까? 더 핫한 여자들 만나서 노나 봐.”


 그냥 쿨하게 전화 한 번 해서 똑바로 말해달라고 하려고 전화를 걸었는데 안 받는다.

 길어지는 신호음에 서희는 자존심 상하니까 그냥 끊으라고 했는데, 자꾸 그 폴로셔츠의 넓은 등에 미련이 가는 걸 어떡해!

 하고 후회하라고 했으니 나는 어떤 여자가 귀에 익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기 전까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나는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해솔이는 치킨이나 시켜 먹자 했다. 혜리는 옆에서 회랑 소주도 시켜달라고 난리다.

 그 순간, 내 휴대전화가 번쩍하고 빛났다가 꺼졌다.


 <부재중 전화 1통>


 뭐지? 싶던 차에 서희가 “분명 잘못 눌렀을걸. 전화 안 받고 잠수 타려고 했는데 버튼 잘못 눌러서 ‘아이고’하고 냅다 끊었을 거야. 콜백하지 마.”라고 했다.

 하지만 ‘미련의 여주인공’이 되어버린 나는 기어이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아까 전화를 받은 그 여자만 앵무새 같은 소릴 해댔다.




 그 멋진 남자들과 함께 밤을 보냈다면 3년 치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뻥 차여서 5년 치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었다.


 졸지에 뭘 해보기도 전에 차여버린 입장이 되자 우리는 치킨을 뜯으며 여우와 신포도 우화 같은 이야길 했다.


 “분명 그 남자들이랑 같이 놀았다면 조금만 기분 안 맞춰주면 바로 쫓겨났을걸. 제주도에서 갑자기 밤에 쫓겨나면 깜깜하고 위험해. 안 가길 잘한 거야.”

 “맞아, 사진 좀 봐. 허세 가득해서 강남 클럽 주름 좀 잡지 않았겠어?”

 “그냥 적당히 오이지 같은 애들 만나는 게 속 편해.”


 마음 한편에 남은 아쉬움은 떨쳐내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즐거웠다.


 다음날, 어이없게도 그 남자에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카톡이 왔다.


 “저희 요트 있는데. 같이 요트 타러 갈래요? 태워 줄게요.”


 솔직히 하나도 설레지 않고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지난밤 기다리게 한 것에 사과 한마디 없는 걸 보고 역시 우리가 전날 밤 이야기한 포도가 시다 못해 썩은 포도였구나 싶었다.

 전화까지 와서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면 제트스키를 타고 오겠다는 둥 은근히 재력을 뽐내려는 말을 몇 마디 던졌지만 나는 그냥 서울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넷 다 기가 차서 그냥 이번엔 내가 연락 다 무시하고 자존심이라도 챙기는 거로 합의했다.


 “그 정도 멋진 남자들이라면 우리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드는 소리 하면 바다 한가운데서 뛰어내리라고 할지도 몰라.”

 우리에게 아무 짓도 여지도 주지 않은 그 남자들에게 일부러 자존심 챙기려 힐난했다.


 어찌 되었든 한 여름밤, 짧게 남은 설레는 시간이라 기억에는 오래 남을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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