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우정 모두 박살 냈다
전 남자 친구와는 압구정에 있는 한 라운지 바에서 만났다.
나는 혼자 칵테일이나 위스키 마시는 걸 즐겼고, 그 바의 분위기와 술맛, 그리고 음악 디제잉까지 사랑했다. 평범한 스물두 살 대학생 치고는 꽤 자유분방한 취미였는지도 모르겠다.
비가 오는 날엔 달위니 한 잔, 날이 좋으면 좋은 대로 라임 모히또를 주문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은 혼자, 혹은 친구와 방문하다 보니 자연히 그 바 사장님, 직원들과 가까워졌다.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며 얼음이 든 셰이커를 흔드는 모습, 그리고 개구쟁이 같은 웃음에 반해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웃고 울고 싸우기를 8개월 내내 반복했다. 그는 '평범한 대학생'인 나의 평범한 삶과 연애하고 있었고, 나는 밤낮이 바뀐 '올빼미 바텐더'와 만난 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바텐더 일을 그만두고 일반 회사 인턴으로 취업하겠다고 선언했다. 앞으로 낮과 밤이 뒤바뀐 패턴의 연애를 이어갈 필요가 없단 생각에 진심으로 그를 응원했다.
주변 선배들을 보면 연애 중에 한 사람이 먼저 취업하고 나면, 얼마 가지 않아 헤어지는 모습을 많이 봤다.
나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취업 준비를 시작했고, 그는 유명한 회사에 취업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바빠졌다.
하루 종일 휴대전화를 달고 살던 남자 친구로부터 연락이 뜨문해지고, 주말이 되었는데 그냥 쉬고 싶다고 했다. '나를 만나는 게 쉬는 거나 다름없지 않아?' 하고 생각했지만 딱히 뭐라 말도 못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얼굴을 못 본 지 열흘쯤 되었을까. 7시 퇴근 시간에 맞춰 그의 회사 근처에 찾아갔다. 그는 압구정역 앞에서 나를 한번 안아주고는 오늘은 너무 피곤하니 바로 집에 가겠다고 했다. 나는 벙찐 표정으로 "그래, 나는 버스 타고 갈게." 하니 그는 알겠다고, 조심히 들어가라며 지하철역 계단을 따라 뒤도 보지 않고 내려갔다.
그리고 나는 압구정역 2번 출구 앞 은행 앞에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중에 내가 취업한 뒤에야 어느 정도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새로운 회사에 취업하면 원래 살던 삶과 다른 사회가 펼쳐지고, 새로운 사람이 쏟아져 들어오기 마련이다. 같은 회사 사람과는 구구절절 내 업무와 프로젝트가 어떻고, 어떤 팀장이 나를 힘들게 하는지 다 설명하지 않아도 먼저 어깨를 토닥여주기도 하고, 소주나 한잔하자고 위로도 해 준다.
그래서 그 안의 생활과 사람에 익숙해져서,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 기간 동안 연인에게 신경써주기 어려워서 연애가 끝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그래도 나는 아직까지 압구정역에서 그냥 계단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던 그의 뒷모습이 야속하다.
그의 재직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 연인 사이 지속 여부와 상관없이 나는 여전히 그 바에 혼자 갔다.
사장님은 "그 자식이 너를 담을 그릇이 못 돼. 더 좋은 사람 만나, 소연아." 하며 맥캘란 한 잔을 따라 주었다.
10시쯤 되자 DJ가 출근해서 믹싱을 시작했고, 2시가 넘은 시간이 되니 그 DJ는 한숨 돌리고 바에 앉았다. 안면이 있긴 했지만 대화를 많이 해보진 않았기에 그날 처음으로 그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상상한 모습보다 진중하면서도 유쾌한 사람이었다. 사장님과 나, 그 DJ는 종종 바에 셋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좋아하는 음식부터 영화까지.
그러다 어느 날, 그에게 문자 메시지가 왔다.
[마블 영화 개봉했던데. 소연 씨, 마블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보러 갈래요?]
그렇게 그와 처음으로 밖에서 만났다.
마블 세계관과 맛있는 라멘집을 탐방하러 다닌 지 두 달쯤 되었을 무렵, 그가 나에게 고백해왔다. 나도 마음이 끌렸지만, 한편으로는 내 전 남자 친구의 친구와 만나게 되는 셈인지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어떻게 자기 친구를 두고 나에게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지 의아하기도 했다.
나는 내 친구의 전 남자 친구와 사귀기는커녕 단 둘이 보거나 연락할 생각도 없다. 그런데 종잇장도 아니고 습자지만 한 이 두 남자의 우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절친한 사이까진 아니더라도 몇 년을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던 사이인데.
그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가 아니니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손절해도 상관없다고 했다. 나도 그 당시엔 눈이 돌아서 "뭐 어쩌라고?" 하고 그와 사귀기로 했다.
그리고 그의 얇디얇은 의리는 내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이별이 없다지만, 우리는 정말 '나쁘게' 헤어졌다.
그리고 그 바에도 더 이상 가지 못했다.
우리가 만나던 중, 사장님이 조용히 그를 불러 말했다. 아무리 너희가 사랑하고, 네가 네 친구와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해도 나는 너희를 내 가게에서 보기 싫다고. 그래서 그는 그 바에서 하던 디제잉도 못하게 되었다.
그때는 사장님이 너무하단 생각도 조금은 했지만, 지금은 이해한다.
나는 어리석었고 그는 이기적이었다.
솔직히 나야 뭐, 두 남자를 잃은 게 아쉬울 것도 없지만, 그는 사랑과 우정, 거기에 직장까지 다 잃었다. 나로서는 아주 꼬수운 일이지만, 아마 그는 오래도록 후회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