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몰라. 어느 날 그냥 이곳을 걷고 싶어졌다.
Saint Jean Pied de Port (0km)
= 0km
그제 파리로 들어와 2박을 하고 오늘 드디어 생장드피에드포르로 출발한다. 09시 52분 TGV에 올랐다. 스타벅스 아아 하나 들고. 음- 고향의 맛.
원래 계획은 파리에서 1박만 하고 어제 곧장 출발하는 일정이었는데, 마침 재외국민 투표가 5월 25일까지가 아닌가!
그렇게까지 해서 뽑고 싶은 후보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생에 언제 또 있을지 모를 재외국민 투표를 경험해 보고자 기차표 등 일정을 하루씩 미뤘다.
해보니 정말 별 건 아니었지만, 손등에 찍어 나온 투표 도장과 에펠탑을 한 프레임에 걸어 사진 한 장 남겼다.
그렇게 파리에서의 이틀을 보내고 나는 지금 TGV에 올라 매거진의 첫 글을 시작한다. 기차는 지금 막 출발했다. 아 역방향이네 X…
사족이 길었다.
첫 글에선 앞으로 걸으며 숱하게 받게 될 질문에 대해 스스로 한 번 정리해보고자 한다. 바로 “왜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서게 됐냐”는 것.
솔직히 잘 모르겠다. 회사 선배들한텐 대선을 앞두고 국회를 비우며 이건 내 ‘버킷리스트’라며 양해를 구했지만 사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안 지도 얼마 안 됐다.
(아, 우리 회사는 만으로 5년마다 한 달짜리 유급휴가를 준다. 거기에 연차를 좀 붙여 6주를 만들었다. 짜릿하지. 우리 회사 최고의 복지다)
6주 간의 휴가. 정말 정말 많은 선택지가 있었다. 사실 뭐 세계일주도 가능하다. 프랑스 소설가 쥘 베른의 <60일간의 세계일주>가 나온 게 1873년이니, 150년쯤 지난 지금 6주면 쉬었다 가도 가지 않겠나.
행복한 고민을 하며 여러 여행지 후보들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때 그냥, 정말 그냥 내 마음에 와서 꽂혔다.
그때 꽂힌 산티아고 순례길은 지은탁이 빼주지 않으면 결코 빠지지 않는 도깨비 가슴의 칼자루처럼 박혀서는, 아무리 다른 선택지들을 둘러봐도 시큰둥했다.
이집트 다합에서 프리다이빙 하기, 발리 서핑캥프에 들어가기, 미국 로드트립, 유럽 자전거 여행, 쿠바, 남미, 북유럽, 아프리카 등등 멀어서 못 가본 곳들.
순서가 이게 맞나 싶긴 하지만, 그렇게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나서야 나는 왜 내가 이곳에 가고 싶은 걸까를 생각해 보게 됐다.
먼저, 나는 이번 여행에 앞서
많은 걸 계획하고 싶지가 않았다.
여행을 떠날 땐 한정된 시간 내에 그곳을 최대한 ‘잘’ 즐기다 오고 싶은 마음이 동반되기 마련이다. 잘 즐기려다 보면 시간을 쪼개 동선을 짜고 효율성을 따지게 되는데, 나는 그게 싫었다. 예전에, 그러니까 20대에 나는 정말 자유분방하고 즉흥적이었다. 난 요즘 그때 내 모습이 좀 그립다. 30대가 되고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서 갈수록 뭔가를 계획하게 되고 짜놓고 움직이게 되고 행동에 보험을 들게 되고 그런 게 싫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냥 걸으면 될 것 같았다. 그때그때 컨디션과 기분에 따라. 걷고 걷고 걷고. 그게 좋아 보였다. 숙소도 예약하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해 침대가 남아있는지 물어보는.
두 번째로는, 머리를 좀 비우고 싶었다.
국회에 출입 기자로 있으면서 작년 말 겪은 비상계엄과 그 후 일련의 일들이 나에게는 퍽 충격적이었다. 더구나 내란 옹호 세력을 취재하는 역할을 맡다 보니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이건 정치적 지향이나 정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명백히 틀린 걸 틀렸다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을 기록하고,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광기 어린 행동들을 지켜보며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기준점 같은 것들이 흔들렸다. 매일매일 내 안에는 충격과 혐오와 분노와 좌절이 켜켜이 쌓여갔다. 퇴근해 혼자 집에 누워서도 머릿속에서는 뉴스가 꺼지질 않았다. 소위 ‘정치병자’가 돼있었다. 머릿속의 정치 뉴스를 좀 끄고 싶었다. 그래서 걷고 싶었다. 곳곳마다 선거 벽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식당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떠들지 않는 곳에서 긴 산책을 하고 싶었다.
셋째로는 또 한 번 뭔가 성취하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루틴으로 반복되는 일상 말고, 뭔가 도전하고 이루어내는 경험. 일상의 도파민이 주지 못하는 짜릿한 성취감. 아 물론 산티아고 순례길은 레이스가 아닐뿐더러 심지어 시작점과 끝지점이 공식적으로 정해져 있지도 않은 수많은 루트들 중 하나를 걷는 여정일 뿐이다. 그 의의는 도착지나 목적지가 아닌 매일의 순례길에 내딛는 한 발 한 발에 있다는 건 잘 알겠지만, 어쨌든 그 긴 여정 끝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면 매일매일 길 위에서 느낀 감정들과는 또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고 나면 나는 또 그 감정과 기억으로 한동안을 살아가겠지, 싶었고.
마지막으로, 사실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건 비밀.
생장드피에드포르에 도착했다. 파리에서의 이틀과 순례길 이후 포르투갈 여행을 위해 캐리어를 싸 온 탓에 곧장 우체국으로 향해 캐리어를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까지 보냈다. 그리고 우체국 저울로 내가 메고 갈 백팩 무게를 처음으로 재봤다. 12.46kg… 뭐? 유튜브를 보면 5-6kg에 맞추고 싶었는데 8kg가 됐다느니, 자기 짐이 10kg에 육박해 순례자로서의 자세가 안 됐다느니 하던데,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나도 모르겠다. 내 가방의 무게가 내 욕심의 무게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앞으로 무얼 버리고 무얼 더 담을지 모르겠지만, 고민하다 결국 두고 오지 못한 욕심을 그득그득 안고 출발한다.
그리고 순례자 사무소에 들러 순례자 여권과 가리비 껍데기를 받아 나왔다. 유튜브에서 숱하게 봤던 장소와 장면을 직접 마주하니 화면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약간 디지몬 어드벤처 그런 느낌적인 느낌. 순례자 사무소에서 나를 맞이한 봉사자는 마지막으로 내게 자신이 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얘기는 ‘믿음’이라는 것이었다. 나에게 필요한 것들이라면 결국 나타나게 될 것이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엔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생각해 보라는 것. “The main thing I wanna say is ‘trust’. When you need things, it’s gonna show up. And when the things are working against you, maybe you need to think what you are doing. Buen Camino!”
선물 같은 당부를 듣고 나와 예약해 둔 첫 번째 알베르게에 들어와 체크인을 했다. 알베르게 주제에(?) 여느 에어비앤비 못지않게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곳이었다. 아주 친절한 부부 봉사자들로부터 몇 가지 주의사항을 전달받고 침대를 배정받았다.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다 커피를 한 잔 하고 길 한복판에서 커다란 골든 리트리버 두 마리를 만났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바로 내 앞에 배를 깔고 눕길래 나도 길 한복판에 퍼질러 앉아 한참을 쓰다듬었다.
바로 근처에 성당이 있길래 들어가 아주 오랜만에 성호를 긋고 아주 오랜만에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앞으로의 여정동안, 다른 순례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순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너무 오랜만에 예수님한테 DM을 보낸 거라 읽으실진 모르겠다.
내일부터 시작이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날씨와 어떤 일들을 겪게 될지, 내 체력과 발과 기분은 어떨지, 어떤 감정과 생각들을 마주하게 될지, 모든 게 기대된다. 부엔 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