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 ~Roncesvalles

”스페인 네가 ‘자기야 미안해’ 했잖아? 나폴레옹 길 이딴거 안 나왔어”

by 아레카야자


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25km)

= 25km


순례길의 본격적인 첫날. 많은 선배 순례자들이 그리도 겁을 주던 첫날이다.

생장드피에드포르에서 론세스바예스까지 약 25km. 거리로는 순례 일정 중 짧은 편에 속하지만 피레네 산맥을 정면으로 넘어야 해서 일정 중 가장 악명 높은 코스로 꼽힌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스페인 침공 당시 군대를 이끌고 넘었다는 것에서 유래해 ‘나폴레옹 길’이라고 불린다. 진짜 이걸 넘어 전투를 치렀다고?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한 난 지금 침공은커녕 닭싸움할 힘도 없다.




생장드피에드포르 알베르게에서 6시에 눈을 떴다. 첫날이라 모든 게 어색해 다시 짐을 싸는 데에만 30분 가까이 걸렸다. 나폴레옹은 부관들이 군장 다 싸줬겠지? 그럼 거저네,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부관은커녕 심부름시켜 먹을 일병도 없는 나는 한숨을 푹푹 쉬며 준비를 마치고 내려갔다. 내가 묵었던 알베르게에는 06시 30분마다 아침 점호, 는 아니고 순례자들을 위한 일종의 정훈교육을 해줬다. 눈을 감고 이곳에 왜 왔는지 한 번씩 되새겨보라든지 앞으로 만날 사람들과 상황들에 대해 떠올려보라든지 하는. 준비는 끝났다. 이제 출발.



다행히 아침부터 날씨가 무척 좋았다. 좋았다고 해서 마냥 쨍쨍하기만 한 게 아니라 적당히 구름이 껴서 걷기 딱 좋은 날씨. 아침 공기는 상쾌하고 온도는 적당하고 낯선 곳이 주는 적당한 긴장과 설렘. 더할 나위 없는 출발이었다. 프랑스인 할아버지와 대화를 주고받으며 씩씩하게 걸었다. 놀라운 점은 이미 오늘이 35일째라는 것. 두 달이 넘는 여정을 걸어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까지 가신다고 했다. 한참 앞서 걷는 할머니가 당신의 아내분이었는데, 따라가기 벅찬 듯 “She is almost running this morning!” 하셨다. 아니 뭐 좋은 걸 드시기에 35일 차에 그 속도가 나오시는 건지? 오기 전까진 걸으며 만나는 순례객들과 스몰 토크를 하다 언제 끊어야 할지가 참 애매할 것 같았는데 실제론 서로 속도가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 순간 자연스레 멀어졌다 다시 또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며 어려움 없이 말을 섞을 수 있었다. 중간에 만났던 또 다른 아저씨는 덴마크 분이셨는데, 11년 전 첫 까미노 이후로 이번에 네 번째라고 했다. 아내분은 무릎이 안 좋아 첫날의 피레네 산맥은 스킵하고 론세스바예스에서 기다리신다고. 놀라운 유러피안 할저씨들의 연속이었다.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시간과 공간은
참으로 한국인들의 것과는 다르겠다고 생각했다.



오리손 산장은 피레네 산맥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영상으로만 보던 곳에 직접 다다르니 그 감동은 마치 오늘치를 다 걸은 기분이었다. 기분만 그랬다. 오리손엔 한국인 모녀 세분이 먼저 앉아계셨는데 “한국분들이시죠? 안녕하세요!”하고 말을 걸자 어색한 듯 “네 안냐세여”하고는 일어났다. 뒤이어 혼자 걷던 한국인분도 헥헥대며 도착하길래 “고생하셨어요. 아까 보니 얼굴이 시뻘게지셨던데!” 했더니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과 목소리로 “네 진짜 힘드네요”했다. 나는 제로콜라와 샌드위치 반의 반 개를 먹고 물을 채워 다시 길을 떠났다. 오래 쉬면 퍼질 것 같아 콜라 한 캔을 비우자마자 걸음을 재촉했다.



첫날이라 그럴 수도 있고, 내가 원체 그런 인간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순례길에서 조차 앞서가는 사람을 따라잡으면 기분이 좋았고, 뒤에서 누가 쫓아오면 그 걸음에 맞춰 뒤처지지 않게 걸었다. 안다. 쫓아온다는 말 자체가 어폐가 있다. 그저 그의 속도대로 내 뒤에서 걸을 뿐인데 나는 그걸 또 의식하며 걷고 있었다. 하루하루 시간 안에 도착하면 누가 숙소를 공짜로 주기라도 하나? 며칠 안에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 도착하면 인증서에 꿀이라도 발라주나? 왜 그러는데 증맬루.



가파른 오르막이 끝나고 윈도우 바탕화면이나 텔레토비 동산 같은 풍경이 펼쳐지며 양 옆으로 풀을 뜯거나 나자빠져 쉬고 있는 양들과 말 떼가 보였다.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아무리 비유해보려고 해도 한국의 어딘가에는 비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강원도 삼양목장? 아 그러지 말자. 말과 양의 목에는 방울이라기엔 좀 크고 종이라기엔 좀 작은 무언가가 달려있었는데, 동물들이 움직일 때마다 띠딩- 띠딩- 소리를 냈다. 그 종소리가 풍경과 섞여 넋 놓고 바라보기에도 아까운 장관이 펼쳐졌다.



그렇게 좀 더 가다 보니 완만한 동산에 자리를 잡고 스낵을 먹는 순례자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젊은 서양인 네 명이 모여있길래 괜히 기웃거려 보려는 심정으로 다가갔는데, 세상에 한 명의 양손이 피범벅인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약지 끄트머리가 무언가에 베였는데, 생각보다 피가 많이 나 다른 세 명이 도와주고 있는 참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물티슈를 건내 양손을 닦게 했는데 물티슈 세 개가 모두 빨갛게 물들 만큼 피가 묻어있었다. 부상자는 LA에서 와 혼자 걷고 있는 순례자였고 도움을 주던 친구들은 프랑스인 무리였는데, 셋은 시간을 좀 더 보내고 간다고 해서 내가 부상자 친구와 동행했다. 둘이서도 이 얘길 하며 웃었는데 고작 약지 하나 못쓰게 됐다고 얼마나 많은 불편함이 있던지, 그 친구는 배낭의 버클을 풀고 체결하는 것부터 물을 마시는 것까지 애를 먹었다. 결국 우리는 론세스바예스까지 함께 오게 됐는데 그녀는 오른손을 심장 위로 치켜들고 한 손에만 스틱을 든 채로도 손가락 외엔 아무 이상 없다며 한시도 쉬질 않고 달려 내가 오히려 따라가기 벅찼다.



도착한 론세스바예스는 호텔 세개와 성당 하나, 알베르게 하나가 전부인 작은 마을이었다. 그 와중에 알베르게는 정말 커서, 안락한 숙소라기보단 대형 양계장 같았다. 다리를 절뚝이며 지친 표정을 한 닭들로 가득찬.



그렇게 순례 첫날을 마쳤다. 종아리고 발이고 어깨고 안 쑤시는 데가 없다. 도착해 샤워부터 하고 빨래를 맡기고 나와 근처 호텔의 테라스 바에서 맥주 한 잔과 감자를 먹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대존맛. 생각해 보니 오늘 하루 종일 오리손에서 먹은 샌드위치 반개 말고는 먹은 게 없었다. 여러모로 미숙한 첫날이었지만, 벌써부터 몇 명의 인연들과 추억거리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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