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의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
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 Zubiri(22.3km)
=47.3km
참 신기하다. 아 진짜 못 걸어, 싶은 심정이었는데 또 새벽같이 짐을 챙겨 동도 트기 전에 길을 나서니 그런대로 걸어졌다. 대학시절 미식축구를 하며 여름방학 합숙훈련을 가면 딱 이런 느낌이었다. 물론 그때가 훨씬 힘들긴 했는데, 그때도 ‘아 나 진짜 이제 숟가락 들 힘도 없어’ 하다가도 다 같이 물병과 약통을 챙겨 반쯤 감은 눈으로 터덜터덜 운동장에 도착하면 또다시 부딪히고 넘어지며 훈련을 할 수 있었다. 하면 다 된다. 아, 다는 아니고 웬만하면 된다. 그러고 보니 프리다이빙도 마찬가지네. 더 이상 숨을 참으면 죽을 것 같아, 하다가도 막상 좀 더 참아보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좀 더 깊거나 먼 곳으로 갈 수 있어질 뿐이다.
어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물병에 물도 가득 채우고 초코렛도 두 봉 챙겼다. 오늘은 어제에 비해 수월한 코스다. 물론 첫날에 비하면 앞으로의 (거의) 모든 코스가 수월하긴 하다. 길을 나서자마자 이탈리아에서 온 다미아노를 만나 함께 걸었다. 다미아노는 ‘진짜 커피’를 마시고 싶다며 성화였다. 역시 이탈리안! 심지어 스페인에서도 커피 불평을 할 줄 몰랐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바에서 나는 라떼를, 그는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마실만은 했는지 단숨에 비웠다. 반바지에 코를 훌쩍거리길래 얼른 먼저 가보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마을이 나와 나는 또다시 바에 들렀다. 테라스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는데 맞은편에 서양인 여자애가 한 명 있길래 “여기 바에 세요(도장) 있던데 찍었어?” 했더니 “아 돈 케어”하고 쿨하게 받아쳤다. 인사를 나누고 국적을 묻기에 한국이라고 했더니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아델입니다.” 하길래 나도 “Bonjour. Je M’appelle Jiho. Tu t’appelle comment?” 했다. 중학교 때 제2외국어로 불어를 배우고 남은 작고 소중한 문장이다. 그렇게 인사를 트고 나서 끝까지 함께 걷게 됐는데, 프랑스인인 그녀는 프랑스 중간쯤 시작하는 다른 루트(이름은 까먹었다)부터 시작해 오늘이 벌써 34일째라고 했다. 총 여정이 1700km쯤 된다고…. 땡그리 안경 쓰고 집 앞 편의점 갈 때나 입을 것 같은 반바지 차림에 길이는 맞지도 않는 스틱을 쥐고 당차게 걷는 모습만으로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내공이었다. 박찬욱의 <올드보이>와 <아가씨>를 봤다기에 내 최애 한국영화는 <헤어질 결심>이라고 꼭 보라고 추천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또 다른 프랑스인 맥스를 만나 셋이 함께 걷게 됐다. 걷다 헤어졌다를 반복했던 지난 동행들과 달리 함께 쉬고 함께 출발하며 걸은 동행은 처음이었는데, 제법 얘기가 잘 통하고 재밌었다. 수많은 주제로 얘기를 하다가 한국에선 법적 최대근로시간이 주 52시간이라고 했더니 “52시간?!”하며 놀랐다. 자기네는 35시간이 보통이고 많이 하면 38시간을 일한단다.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얘네는 일 년에 8주에서 12주 정도의 휴가를 받는다고. 한국에선 여타 어느 회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내 한 달 휴가가 얘네한텐 그저 해마다 받는 휴가의 절반정도라니. 우린 일 년에 보통 1주, 많으면 2주 정도 휴가를 간다고 하니 아델은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어떻게 그렇게…”했다. 어떻게 그렇게 뭐!
셋이 길가에 퍼질러 앉아 쉬는 중에 내가 ”너희는 유럽 사람들 중에 프랑스인은 딱 보면 알아볼 수 있어?“ 했더니 맥스는 갸웃하는 반면 아델은 제법 자신하길래 지나가는 순례객들을 보며 맞혀보라고 했는데, 무려 0%의 정확도를 자랑해 우리 모두 웃었다. 심지어 외모가 분명히 다르다던 독일인에까지 ”프랑세스?“ 한 건 진짜 웃겼다. 나는 콜라를, 아델은 초코렛을 애타게 찾으며 걸어 도착한 주비리에는 숙소를 예약하지 않은 순례객을 위한 침대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오는 중에 아델이 한 곳에 전화했을 때 분명 “1시 전에 오면 워크인 분량을 선착순으로 배정한다”고 했는데, 12시 55분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마감이었다. 예약해 둔 나와 맥스만 남고, 아델은 다음 도시로 5km를 더 걸었다.
도착해 체크인도 하기 전에 문 연 바로 달려가 콜라와 또르띠야를 시켰다. 콜라를 얼음컵에 기가 막힌 표면장력으로 따라준 직원에게 감탄사를 날리고 그 자리에서 반정도를 벌컥벌컥 마시고 “이 맛에 걷는다”고 하자 웃었다. 들어오며 화장실 위치를 이미 봤지만 괜히 스페인어 한 번 해보고 싶어 “Donde esta el bano?”하고 물었다. 테라스에 신발 벗고 앉아있으니 세 명의 프랑스인(맥스와 안토니, 알릭스)과 호주인(케이틀린)이 와서 앉았다. 우리 모두 첫 또르띠야였는데, 아주 맛있어 다 같이 감탄하며 먹었다. 먹고 나서 샤워 때리고 나오는데 같은 숙소에 묵는 케이틀린이 와서는 “아까 걔네랑 개천 갈 건데 같이 갈래?“ 하길래 따라나섰다. 깊어봐야 무릎도 안 오는 높이라 중간까지 들어가 발을 담갔는데 시릴 만큼 시원했다. 스페인 중딩쯤 돼 보이는 애들이 웃통을 까고 첨벙이며 공 놀이를 하고 있었다. 청소년쯤 돼 보이는 리트리버 한 마리도 분주하게 공을 쫓아 헤엄치고 있기에 나도 공 한 번 던져줬다. 케이틀린과 맥스한테 와서 모여보라고 하고는 옹기종기 놓인 6개의 발 사진을 찍었다. 한국에선 개천에 발 담그면 이 사진은 국룰인 법인데, 이 흔한 인스타용 사진이 얘네한텐 제법 신선했나 보다. ”인스타 올리고 너네 태그 할게! “ 했더니 케이틀린은 ”내 발 사진을 올리겠다고?!“ 하길래 철회했다. 그리고 셋이 천변에 퍼질러 앉아 물수제비를 뜨고 이런저런 대화를 했다. 29살의 케이틀린은 총 4개월 정도의 일정으로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중간에 돈 떨어지면 돌아갈 수도 있고!“ 하는데 ‘무슨 일을 하길래 저리 오래 놀 수 있지?’하는 생각을 1초쯤 하고, 어찌 됐든 쿨하고 멋져 보였다.
오늘 묵는 숙소엔 한국분들이 정말 많았다. 혼자 온 여자분과 커플(로 추정) 외에도 단체로 온 것 같은 아저씨 아줌마 무리가 단체로 들어왔다. 아까 샤워를 할 때도, 천변에서 노가리 깔 때도, 지금도 주위에서 한국어가 들린다. 뭐 한국 분들 뵈면 반갑고 좋은데, 싫다. 아니 뭐 딱히 싫은 건 아닌데, 아니다 싫다. 한국분들의 잘못은 아니고, 그냥 내가 여기까지 와서 한국사람들과만 어울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다. 그러니까 No offense. 생장에서부터 한국인 분들과 마주치며 걸어온 여자분도 나한테 내일부턴 한국인 단체와 안 겹치고 싶어 내일 일정을 하루 끊어갈까 한다며 속내를 내비쳤다. 주비리는 작은 마을이라 슈퍼마켓은 17시에 문을 닫고, 레스토랑은 하나뿐인데 구글맵엔 종료 시간이 안 나온다. 맘 놓고 이걸 쓰고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네. 이러다 저녁을 쫄쫄 굶는 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