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만나고 헤어짐이 이미 정해져 있지 않기를*
*김오키 동명의 곡에서 차용
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 Zubiri - Pamplona(21.5km)
= 68.8km
계획대로라면 맨 마지막 날을 제외하고는 단순 거리상 가장 짧은 날이다. 그러나 지난 이틀의 피로가 쌓여서인지, 처음으로 30도에 육박한 날씨 때문인지, 경로 내내 혼자였기 때문인지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거리와 난이도가 꼭 정비례하지는 않겠지만, 고작 20키로 초반대에 이리 힘들어서야.
아침부터 난관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밤새 널어둔 빨랫감을 가지러 마당으로 나가보니, 빨랫감은 아침 이슬에 흠뻑 적셔져 있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이건만 그게 내 빨랫감에 맺혀 있으니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가방에 매달고 걸으며 말리는 것도 양말 정도지, 긴 바지와 바람막이까지 흠뻑 젖어 있으니 별 수가 없었다. 그대로 가방에 쑤셔 넣었다. 가서 다시 빨고 말리지 뭐. 눈을 뜬 건 6시 9분. 출발 시간은 그로부터 한 시간도 더 지나서였다. 갈수록 속도가 빨라져야 맞을 텐데 오늘은 또 준비 시간이 왜 이리 오래 걸린 건지. 아무튼 셋째 날도 출발.
*김민기 <아침 이슬> 가사 중 인용
오늘은 앞 뒤로 아는 얼굴들이 보이지 않아 처음으로 에어팟을 꽂고 걸었다. 유튜브 뮤직에서 내 취향껏 알아서 재생해 주는 플리를 틀었는데 함께 걷기에 딱 좋았다. 취향이라는 것이 한결같지도 않거니와 내 취향은 꽤나 들쑥날쑥 한 편인데도 적당히 힘이 나면서 너무 시끄럽지는 않은 적당한 노래들이었다. 언니네 이발관이나 델리스파이스 같은 어르신 밴드들(ㅈㅅ)부터 박소은, 정우 같은 여성 보컬들의 목소리도 섞였다. 업다운이 많지 않은 경로였어서 스틱을 가방에 꽂거나 한 손에 뭉쳐 쥐고는 양팔을 휘적거리며 리듬을 탔다. 또 오늘은 특히나 다양한 동물들이 곳곳에 있어 보는 재미가 있었다. 양이나 말은 지난 이틀간 여러 차례 봤는데, 소나 거위는 처음이었다. 암소인데도 뿔이 근사하게 나있던데, 무슨 소인지는 모르겠다.
팜플로나의 직전 마을인 비야바에 들어서자 진정한 ‘도시’의 모습이 나타났다. 순례자보다 주민들이 훨씬 많은, 정말 그냥 사람 살아가는 도시. 놀이터엔 아이들이 모여 까르르거리고, 작은 광장엔 천막 아래 과일 장사가 한창이었다. 어제 같은 알베르게에 묵었던 한국인 두 분이 벤치에서 쉬고 있길래 인사를 건넸더니 귤을 하나 나눠줘 감사히 받았다. 크기며 생김이 꼭 귤 같아 귤인 줄 알았는데 맛은 레드향에 가까웠다. 정말 맛있어서 몇 개 더 사 먹을까 하고 천막으로 갔더니 줄이 길어 포기했다. 급한 일도 없는데 몇 개 사 올걸. 도시가 나와 팜플로나도 지척인 줄 알았는데 또 그건 아니었다. 아니, 평소 기준으론 지척이 맞긴 맞는데 내가 걷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또 꽤나 성가신 거리였다. 젖은 옷들 때문인지 오늘따라 가방은 또 드럽게 무거워서 막판 3-40분이 꽤나 고역이었다.
팜플로나에 도착해 미리 예약해 둔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하고 샤워를 마친 후 도시 탐방을 나섰다. 유럽 도시는 모름지기 광장 주변에 가야 느좋 카페나 식당들이 있는 법이라 무작정 향했다. 가다 보니 거리가 온통 핀초스 바길래 바깥 자리가 비어있는 아무 곳이나 들어가 핀초스 두 개와 올리브 꼬치, 맥주 한 잔을 시켰다. 첫 입으로 올리브를 먹었는데 혼잣말로 “아니 뭐야 이거”가 절로 나올 만큼 맛있는 올리브였다. 내가 여태 먹은 건 다 올데드였나 싶은 맛이었다(올‘리브live’, 올’데드dead’ 뭐 그런 거였는데… 별로였음 쏘리다). 좀 더 정처 없이 걸어볼까 아님 숙소로 돌아가 좀 디비져있을까 하는 차에 스타벅스가 보여 불멸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때렸다. 짜장면이 중식이 아니라 한식이듯, 아아는 이름만 미국 거지 이제 한국 국적을 줘야 하지 않나 싶다. 이만한 고향의 맛이 또 있을까. 더구나 지금 팜플로나는 32도다. 이럴 경우 아아는 음료가 아니라 약이다. 별다방이 아니라 별약국인 셈. 아아 한 잔에 주접이 심했다.
어제 번호를 교환한 아델에게 팜플로나 잘 도착했는지 물었더니 금세 프랑스 친구들과 ‘카페 이루냐’에 있다고 오겠냐고 했다. 방금 지나온 곳이었다. “와이낫! 윌비데어” 했다. 갔더니 어제 봤던 맥스와 캐롤라인, 아델이 있었고 처음 보는 아흐완과 여자애 한 명이 더 있었다(이름을 들었는데 그새 또 까먹었다 편의상 A로 적겠다). 다들 샹그리아나 커피를 하나씩 시켜 마셨다. 모두 프랑스인이어서 자기들끼리 프렌치로 말하다가 내게 말을 걸 땐 영어로 하는 식이었다. 캐롤라인과 A는 팜플로나에서 연박을 할 예정인데 내일은 산세바스찬에 간다고 했다. 캐롤라인은 거기서 해안을 따라 걸을 예정이고, A는 서핑을 하고 올 거란다. 아흐완은 레온까지는 프랑스길을 따라 걷다가 거기서부턴 북쪽길과 프랑스길 사이에 있는 또 다른 루트를 따라 걸을 예정이라고 했다. 왜? 했더니 “그냥 거기가 좋다고들 추천하더라고!” 했다.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 도착하고 나면 히키하이킹을 해서 집으로 돌아갈까 한단다. 3개월이 걸려 간 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 만에 돌아오는 건 너무 허무하지 않냐고. 나는 “완전 유러피안 식이네”하는 말로 부러움을 대신 전했다. 맥스에게 내일 어디까지 가냐고 묻자 주변에서 농담조로 “바르셀로나!” 하기에 나도 당연 농담인 줄 알았는데 맥스는 정말로 바르셀로나에 갈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 “기차가 35유로밖에 안 하던데!”하며 “내일 아침에 정하려고”했다. 바르셀로나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 걸을 거냐고 묻자 ”그럴 수도 있고, 그만 걸을 수도 있고, 산티아고까지 가고 싶긴 한데 여름에 다시 와서 걸을 수도 있고“라며 어깨를 으쓱. 어제오늘처럼 앞으로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까지 가는 줄 알았는데 내심 아쉬웠지만 맥스는 ”This is freedom!”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고로 방금 마신 샹그리아가 우리가 함께 마신 마지막 잔이 될 수도 있는 거고, 까미노의 어디선가 다시 마주칠 수도 있다. 오늘이 어쩌면 서로를 보는 마지막 날일 수도 있고, 인스타그램이나 왓츠앱으로 연락을 유지해 훗날 어느 곳에선가 만나게 될 수도 있다. 모든 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만남과 헤어짐이 두렵다. 좀 더 정확히는, 헤어짐이 두려워 만남을 시작하지도 못하는 편에 가깝다. 그런 이유로 동물을 사랑하지만 한 마리도 키우지 못하고, 오래 키운 식물이 죽었는데도 화분을 미처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 정도일진대 새로운 연인을 만나는 건 더 말해 뭐 할까. 저들의 방식이 유러피안 특유의 쾌활함인지, 까미노 특유의 인연인지는 모르겠다. 물론 모든 게 그들의 방식이 옳고 내가 틀린 거라고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오늘의 대화를 통해 느낀 건, 앞으로 까미노를 통해 나 또한 인연 맺기에 대한 태도나 마음가짐을 좀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색소포니스트 김오키의 노래 제목처럼, 우리 만나고 헤어짐이 정해져 있지 않기를. 그리고 그 헤어짐에 좀 더 대범해 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