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도 고무장갑이 필요할 때

나를 보호하는 사소한 방법

by 애나 강


고무장갑을 끼는 순간,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된다.


맨손으로 물을 만질 때는 몰랐던 온도와 감각들이

얇은 고무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해진다.


따뜻한 물은 조금 더 부드럽게,
차가운 물은 덜 차갑게.


마치 세상과 나 사이에
작은 여백 하나가 생긴 것처럼.


이상하게도
고무장갑을 끼면 마음도 같이 단단해진다.


하기 싫던 설거지와
자꾸 미뤄두었던 청소가

그저 ‘해야 하는 일’에서
‘해낼 수 있는 일’로 바뀌는 순간.


물에 젖지 않는 손처럼,
감정도 조금은 덜 젖는 기분이 든다.


나는 가끔
필요하지 않을 때에도 고무장갑을 낀다.


싱크대 앞에 서서
아무 일도 시작하기 전에

천천히 손을 넣고,
공기를 밀어내듯 ‘툭’ 소리를 낸다.


그리고 손목까지
조용히 끌어올린다.


그 짧은 동작 하나가
이상하게도 마음을 정리해준다.

오늘 하루를
다시 시작해도 괜찮다는 신호처럼.


살다 보면
마음이 쉽게 젖는 날이 있다.


별 의미 없던 말 한마디에
괜히 오래 머물게 되는 날.


아무 일도 아닌데
괜히 기운이 빠지는 날.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마음에도
고무장갑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고.


완전히 막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조금 덜 스며들게,
조금 덜 차갑게,
조금 덜 아프게.


그 정도의 거리만 있어도
우리는 충분히 버틸 수 있으니까.


그래서 오늘도 나는
싱크대 앞에 선다.


물을 틀고,
고무장갑을 낀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일부터
조용히 시작해본다.

내 마음이
너무 쉽게 젖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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