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 뒤에도, 우리는 다시 살아간다”

by 애나 강



며칠 동안 얼마나 더웠는지 모른다.
여름이라 덥다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해마다 더위는 조금씩 더 사나워지고 있다.
햇볕에 달궈진 도로를 걷다 보면 발바닥까지 열기가 파고들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후끈한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어쩐지 몸보다 마음이 더 쉽게 지치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비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마음 한켠이 조금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어젯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결에도 웃음이 났다.
마치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처럼, 무심한 듯 다정하게 마음을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창밖으로 들려오는 빗방울 소리가 내 마음을 다시 적신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온통 흐리지만, 그 흐림조차 반갑고 고마웠다.
지붕 끝에 맺혔다가 툭 떨어지는 빗물, 잎사귀 위에 차곡차곡 맺혔다가 반짝이며 흘러내리는 물방울, 축축하게 젖은 공기가 전해주는 선선함이 마음 깊은 곳까지 달래주는 듯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빗소리가 잔잔한 음악 같다.
주룩주룩 이어지는 빗줄기 사이로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날아가며 작은 노랫소리를 보탠다.
비를 머금은 꽃들은 조용히 고개를 흔들고, 나무들은 잎사귀 끝에 맺힌 빗방울을 톡톡 떨구며 숨을 쉰다.
그 모습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숨이 가쁘던 마음도 조금씩 풀어진다.

창문을 열어 살짝 내다보니 바람마저 시원하다.
얼마나 뜨겁고 지쳤을까.
비를 만나 다시 힘을 얻은 바람은 내 볼을 스쳐 지나가며 선선한 시원함을 선물한다.
평소 같으면 무심히 지나쳤을 이 바람이, 오늘은 참 고맙게 느껴진다.
사람도 자연도 더위에 지쳤다가, 이렇게 비를 맞으며 다시 숨을 고르는구나 싶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종종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무심하다.
햇빛이 비추면 밝음이 고맙고, 바람이 불면 시원함이 고맙고, 비가 내리면 마른 땅이 적셔져서 다행이다.
하지만 그 고마움들을 하나하나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 역시 매번 잊고 살다가, 이렇게 마음이 지치고 나서야 새삼 자연이 주는 작은 선물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깨닫는다.

그러나 마음 한켠이 무겁지 않은 건 아니다.
이 비가 누군가에게는 기다려온 선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너무 많은 눈물 같은 재앙이 된다.
멀리 다른 나라에서는 넘쳐나는 비로 삶의 터전을 잃고, 소중한 목숨마저 잃는 모습을 뉴스로 접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비인데 왜 누구에게는 축복이고 누구에게는 시련이 되어야 할까.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작은지, 그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비가 내리면 사람 마음도 잠시 멈춘다.
빗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보면, 언제 이렇게 숨이 차게 살아왔나 싶다.
발걸음은 느려지고, 생각은 조금 더 깊어진다.
쉴 틈 없이 바쁘게 달려오던 마음이 빗방울 소리에 묶여 잠시 쉬어 간다.
마치 비가 괜찮다고, 잠시 멈춰도 된다고 속삭여 주는 것 같다.

나는 오늘 이 빗소리를 들으며 마음속 뜨겁고 답답했던 생각들을 잠시 내려놓아 본다.
빗방울이 온 세상을 적시듯 내 마음 구석구석도 촉촉해지기를 바란다.
더위를 식혀주는 바람처럼 나도 다시 숨 쉴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작은 순간들이 모여 다시 살아갈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닐까.

문득 생각한다.
비가 그치면 더운 햇살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언젠가는 또 숨이 막힐 만큼 덥고 답답한 날들이 돌아오겠지만, 오늘처럼 다시 비가 내려줄 것이라는 걸 안다.
햇살과 바람과 비, 모든 것이 돌아가며 우리에게 작고 큰 선물을 건네준다.
우리는 그 선물을 받아 안고, 그렇게 다시 살아간다.

비가 내린 뒤에도 세상은 다시 빛날 것이다.
잎사귀에 매달린 물방울이 햇살에 반짝이고, 젖은 꽃잎은 더 선명한 빛깔로 피어날 것이다.
더위에 지쳐 축 처졌던 마음도 언젠가는 다시 반짝일 것이다.
오늘 이 순간이 그 반짝임을 위해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비가 반갑다.
빗소리에 묻어 오는 바람도, 잎사귀에 맺힌 물방울도,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촉촉한 공기도 모두 고맙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 작은 바람을 품어본다.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고, 이 비가 다정히 속삭여 주는 것만 같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걸어나간다.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살아가고, 다시 희망을 품는다.
그리고 나는 안다.
비가 내리는 오늘처럼, 다시 살아갈 날들은 앞으로도 얼마나 많이 기다리고 있을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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