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루틴_#1. 우동 한 그릇
국물이 끝내줬던 이유
1월 1일이 시작되면 잠들기 전에 우동 한 그릇을 먹는다.
비싸고 좋은 진짜배기 우동은 안 된다. 반드시 “국물이 끝내준다”는 문구가 봉지에 적힌 인스턴트 우동이어야만 한다. 몇 번 빼먹은 적이 있긴 해도 내가 가진 버릇 중 가장 오래된 버릇이다.
중학생 무렵이었을까. 구리 료헤이의 소설 『우동 한 그릇』을 읽고 연말 겸 연초를 기념하는 나만의 무언가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긴 하다. 그렇지만 소설을 따라한 행동은 절대 아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우리 집은 소설 주인공들처럼 돈이 없어 셋이서 우동 하나밖에 못 시킬 정도로 가난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그 책을 읽기 전에 이미 그 습관을 가졌다.
어느 신정이었다.
새해 첫날은 꽤 오래 동안 꼭 교회에 가야 하는 날이자, 아빠가 1년 중 유일하게 예배를 드리러 가는 신기한 날이었다. 그날 밤도 분명 가족 모두가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갔을 거고, 당연히 찬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을 거다. 그리고 자정을 넘긴 그 시간, 우리 가족은 한 자리에 모여 엄마가 끓여준 우동을 먹었다. 그게 우동에 대한 내 첫 기억이자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버릇의 시작이 됐다.
글을 쓰려다 보니 나도 문득 정확한 시점이 궁금해져 한국방송광고공사 페이지에서 제품을 검색해보니 1998년 광고였다. 24년 넘은 습관이라니. 새삼 놀랍다.
국물이 끝내준답니다!
1월 1일 우동 섭취 캠페인을 벌이는 건 우리 집에서 나뿐이다. 엄마는 심지어 그런 일이 있었다고 기억하지도 않는다. 우린 왜 그날 우동을 먹었을까.
엄마는 TV에서 어떤 음식을 보면 그날 바로 혹은 며칠 뒤에 그 메뉴를 식탁에 올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러니 아마 그날 교회에 가기 전에 김현주가 “국물이 끝내줘요!”라며 호들갑 떠는 광고를 보고 생각했으리라.
“오늘 야식은 저거다”라고.
그날의 우동이 아주 맛있었다고 떠올리지만, 이건 사실 인상이지 맛에 대한 기억은 아닐 거다. 24년 전인 유치원생 시절 먹은 맛을 기억할 만큼 천재였으면 지금쯤 정신병자가 됐거나 유명한 바나나가 돼있겠지. 실제로도 대단히 특출 난 맛이 있을 리 가 없다. 인스턴트 우동이 맛있어 봤자 MSG 맛이지 뭐.
Takamatsu, Kagawa, Japan. 2019정말 맛이 기막힌 우동을 먹은 건 2019년 5월 일본 다카마쓰에서였다.
이곳은 사누키 우동의 본고장이라 그런지 주민들의 1인당 연간 우동 평균 소비량이 230그릇에 달한단다. 심지어 아예 작정하고 ‘우동 택시’(택시 위에 우동 그릇이 얹어져 있는 게 엄청 귀엽다.)를 만들어 관광 요소로 활용하는 말 그대로 우동 천국이었다. 덕분에 여행 내내 우동을 틈틈이 먹어댄 결과, 귀국할 쯤엔 정수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면발로 채워진 느낌이 들었다.
다카마쓰시 어느 한 우동 가게의 메뉴판호텔 직원에게 가이드 맵에 써진 곳 말고 그쪽이 제일 좋아하는 곳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해 찾아간 곳은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특히, 메밀 소바처럼 쯔유에 찍어먹는 자루 우동은...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 이전까지 내가 먹은 우동은 가짜였다.
하지만 여전히 1월 1일은 MSG 맛 국물이 끝내주는 우동을 먹는다. 이 날 만큼은 담당자의 말 대로 정말 끝내준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내 혀가 고급이 아닌 탓도 있겠지만, 그보단 기억이 맛을 배가하는 조미료였지 싶다. 아빠 손을 잡고 오던 날의 추위,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느낀 온기, 그리하여 느낀 집의 안락함 같은 기억이 부족한 맛을 채워준 마성의 조미료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내가 먹고 싶은 건 인스턴트 우동 자체가 아니라 기억이란 조미료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기억에 관해 적은 문장이 생각난다.
“삶이란 게 참 묘하다. 눈을 뜨면 날마다 새로운 날이지만 실상 삶의 관성은 어제를 포함한 기억 속에 있다. 살아봤던 시간의 습관으로 살아보지 않은 시간을 더듬어가는 것, 현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과거인 그런 게 삶이라는 생각도 든다.”
- 한지혜, 『참 괜찮은 눈이 온다』, 교유서가, 2019, 159쪽
신정이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자”고 떠들지만 솔직히 어찌 될지 모른다. 기대감과 함께 생겨나는 불안함에 마음이 서늘해진다. 게다가 계절이 계절인지라 새해 첫날은 늘 춥다. 그래서 1월 1일은 심신을 덥혀줄 무언가가 간절해진다.
그 무언가를 살아보지 않은 시간에서 찾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살아봤던 시간에서 찾아내 20년 넘게 반복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울러 그렇게 얻은 온기로 다가올 한 해를 데우려는 의도일 수도 있고.
2022.01.01
2022년 1월 1일도 우동을 먹었다.
역시나 살아봤던 시간으로 불려 갔다. 그렇지만 내 습관이 과거와 똑같진 않다. 올 해는 우동 옆에 전날 사온 사케 한 병을 두고 반주를 했으니까. 몇 잔 마시다가 입가심으로 롱티도 한잔 말았고.
이렇게 기억이란 조미료에도 슬금슬금 살이 붙어가는 중이다. 약간의 취기가 더해지니 조미료가 더 맛있어지는 것 같아 썩 즐겁다.
그래서 갖게 된 소원 아닌 소원이 하나 있다.
생산 관계자들께 부탁드리고 싶은데...
“앞으로도 열심히 맛 볼 테니 부디 판매 중단되지 않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