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결산을 한다.
별건 아니고, 올해 저장한 자료들을 시간순으로 쭉 훑으며 한 해 동안 내가 뭘 하고 살았는지를 떠올려본다. 지난 기억을 정돈해야 다가올 날이 산뜻할 것 같아 매년 반복하는 일종의 송구영신 의식이다.
공자, 맹자, 스피노자보다 내 삶에 영향을 더 끼친 놀자님 가라사대
“공부 못하는 놈일수록 책상 정리를 기똥차게 한다.”
지금쯤 어린 시절의 바람대로 ‘00맨’이나 ‘00레인저’가 되어 지구 방위 정도는 했어야 하는데 밥그릇 지키기도 쩔쩔매는 신통찮은 어른이 된 탓인지 정리에 심하게 집착한다.
언제부턴가 모든 컴퓨터 파일을 최소 3단계로 분류해 저장한 뒤 외장하드 등 두 곳 이상에 백업해둔다.
글쓰기와 관련한 파일엔 특히나 유난을 떤다. 한 파일의 내용이 10포인트로 2장 이상이면 출력해서 노트에 붙여두고, 그 이하면 필사해둔다.
구태여 이렇게까지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떤 원인에서인지 한글이 쐐기 문자보다 쓸모없어지는 경우가 있어서다.
<뭐시기PT_리얼_진짜_최최최종>에 적은 “가나다라마바사”가 “#$@%&^$꿿?!”으로 표시될 때의 기분을 ‘뭐 같다’ 대신 점잖게 표현할 단어가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런 뭐 같은 상황에 대비해 실물 자료까지 만들어놔야 맘이 놓인다.
업무 관련 자료, 대학 과제, 싸이월드에 올렸던 사진과 비공개 일기…별 잡다한 파일이 그렇게 PC 안팎에서 연도별로 쌓이고 있다.
애당초 의도했던 건 아닌데 저장 자료가 많아지다 보니 연말 결산을 두 가지 방법으로 하게 됐다.
‘연말 결산’이란 말이 주는 느낌처럼 어딘가 딱딱하게 적자면 ‘정성적’으로 그리고 ‘정량적’으로.
컴퓨터 파일 뿐 아니라 노트, 일기장, 티켓북까지 뒤적거리면서 언제 어디에 누구와 있었는지, 당시의 기분과 생각 등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세세하게 곱씹으며 2021년 정성적 회상에 마침표를 찍었다.
‘열심히 잘 살았네. 올해도 수고했어.’로 끝나면 좋으련만 정량적 평가에서 기어코 반성할 점이 두드러지고 말았다.
폴더. [문장 수집] - [2021] _ 올 해는 '시요일' 앱의 영향으로 시의 비중이 상당히 컸다. 남이 쓴 글을 모아두는 [문장 수집] 안의 파일이 내가 쓴 글을 모아둔 [나의 기록]의 것보다 세배나 많았다. 전년 대비까지 헤아리니 아주 엉망이었다.
좋은 문장을 단어 외듯 읽고 베껴 쓰다 보면 내 문장도 조금씩 나아질 거라는 기대로 시작했던 일이었고, 자연스레 배우는 점도 있었다. 문제는 직접 쓰며 노력하기보단 ‘잘 쓸 준비 중이잖아’라며 자기 합리화하는 시간이 세배나 많았다는 사실이다.
‘게으름을 부지런히도 피웠구나. 난.’
별안간 찝찝해진 맘을 달래려 변명도 했다. ‘당장 이걸로 먹고살 것도 아닌데 뭐 어떠냐’고. ‘괜찮다’고.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 ‘먹고사니즘’, ‘괜차니즘’은 제법 그럴싸한 범용 변명 조커인데 이걸 여기에 써버렸다니... 모든 변명은 일회용이라 내년엔 쓰지도 못하는데...어휴 이 모질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내년 연말 결산 때는 올해와 같은 이유로 반성하지 않도록 계획을 세워야겠다. 무리해서 적으면 이러쿵저러쿵 핑곗거리를 쥐어짤 게 빤하니 쉽지도 어렵지도 않게.
[문장 수집] 필사 노트
2022년 글짓기 계획.
최소 월간 기미닉으로 쓰기.
첫 줄 작성일을 기준으로 2주 안에 마감하기.
맘에 안 들어도 마무리 짓고 다른 주제 손대기.
(그래도 생각나면 다음 건 완료 후 수정 재개)
2022년 연말엔 브런치 매거진 하나 묶어 발행하기.
당장엔, 1월 1일 루틴 시리즈 적기.
202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