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은 어린 왕자를 보는 날이다.
우동 먹기가 왕년의 마지막 과업이었다면, 어린 왕자 완독은 신년의 첫 번째 과업이다. 한 권을 한 번에 읽어내려 이날만큼은 아무런 약속도 잡지 않고, 책을 읽는 동안엔 휴대전화도 꺼놓는다.
정초 어린 왕자 완독은 우동 먹기와 달리 몇 해 전에 시작한 역사가 짧은 습관이다. 사연이라기에는 민망한데, 새해 첫 일과는 무언가 멋있어 보이는 일로 시작하고 싶었다. 그런데 멋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몰랐었고, 대학생 시절이라 수중에 돈도 별로 없어 소소한 사치를 부릴 형편도 아닌 게 문제였다.
지출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아 독서를 택했다. 독서는 그때 돈 한 푼 안 들이고 집에서 할 수 있는, 취미라고 말하면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까지 들을 수 있는 가성비가 가장 뛰어난 일이란 연유에서였다.
하필 어린 왕자를 택한 이유는 단지 분량이 적어서였다. 책 읽는 속도가 매우 느린 편이라 함부로 두꺼운 책을 폈다간 하루 안에 해치우지 못할 공산이 컸다. 세계 명작으로 꼽히는데 20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에 삽화도 가득. 오호라.
아테네에서 사 온 그리스어판 『어린왕자』 표지. 보통의 것들보다 글은 적고 사진은 더 많다. 유아용인걸까? 예쁜데다 짧기까지...최고잖아?!
1 회독과 2 회독 사이에 낀 15년여 동안 내용 대부분은 머리에서 지워져 있었다. 다만 설렘이 어쩌고 하는 여우의 관계론 강의가 설핏 스쳤던 걸 보면, 어린 왕자를 처음 읽었을 땐 그 부분에 공감했었던 것 같다. 그 시기에 난 사춘기 소년답게 첫 번째 짝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으니 그럴 만했겠다.
두 번째 완독 땐 허영 쟁이가 제일 인상 깊었다. 그 무렵 난 한 해를 지독히도 되는 일 없이 보낸 탓에 자기 효능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어딘가의 허가가, 누군가의 인정이 너무나 간절했다. 혹시 허영쟁이의 숭배 요청도 실은 자아도취가 아니라 절절한 애원이었을까.
공허한 찬사라도 좋으니 부디 한 번만이라도 자신을 인정해달라는.
박수를 구걸하는 모습이 어딘가 내 처지와 닮았다고 느껴졌다. 낯이 두껍지 못해 그처럼 남에게 대놓고 요구하지는 못했지만.
무의식 중에 어린 왕자에서 특정 시기의 내 마음을 읽고 있었다. 그것도 가장 날것으로.
바뀐 마음의 모양을 마주하는 게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거울에서 찾을 수 없던 얼굴의 변화를 어느 날 꺼낸 사진첩에서 발견한 기분이었달까. 너무 자주도 아니게, 그렇다고 너무 드물지도 않게 정기적으로 어린 왕자를 읽으면 마음의 추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월 1일 어린 왕자 완독 습관은 그렇게 시작됐다. 아울러, 나는 기억보단 기록을 믿는다. 해서, 마음의 추이를 보려 마지막 페이지를 닫은 후엔 꼭 짧은 감상문을 어딘가에 적었다.
어린왕자에게 B612의 장미가 그러하듯 어린왕자를 손에 쥐고 있는 시간에 비례해 이 책은 내게 특별해졌다. 그래서 하나둘 모으다 보니 어린왕자만 열 세권을 갖고 있게 됐다.
2021년 1월 1일 감상문의 중심은 어린 왕자였다.
작년의 내게 그는 아집을 버릴 노력조차 하지 않다 끝내 자살을 택한 사회 부적응자였고, 총평은 ‘어린 왕자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였다. 그리고 1년이 또 지났다. 어린 왕자에 대한 내 평가는 여전히 박했다. 삶이 극적으로 변하지 못한 탓이리라.
그렇지만 조금은 차이는 있다. 올해 감상문의 중심은 소설에서 ‘나’로 등장하는 화자가 됐는데, 이는 조금의 변화이자 지난해 다짐의 연장선이다. 돌아보건대 작년 감상문에는 방향만 있을 뿐 방법이 없었다. 어린 왕자 같은 사람이 되지 않아야겠다는 다짐 뒤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모범답안이 나오지 못했다. ‘나’가 그 답이 됐다. “어른들은 이상해”라며 행성을 전전하는 어린 왕자와 달리 ‘나’는 그 이상한 사람들과 적당히 어울리며 살아간다. 유능하고 평범하게.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솔직히 이런 결론이 아직은 스스로도 조금 찝찝하다. 두 개의 질문이 도저히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의 ‘나’는 어린 왕자에 대한 그리움을 끝내 버리지 못했을까.
나는 그가 어린 왕자를 그리워하길 바라는 걸까 그리워하지 않길 바라는 걸까.
올해의 감상문은 이것으로 끝이다.
여기까지가 내 능력이라 생각하고 내년의 내게 차례를 넘겨야겠다.
내년의 난 무슨 대답을 할까. 명쾌한 해설을 내놓는 날이 오긴 할까. 뭐... 관심 인물이 바뀔 수 도 있겠지.
내년의 감상문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