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동훈 Dec 15. 2018

번역에 대한 잡설

새로운 군사 관련 번역물(영화든, 출판물이든, 게임이든)이 나오면 눈썰미 날카로운 군사팬들에게 무지막지하게 씹히는 경우가 많다.

일일이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mine field를 '나의 밭'이라고 번역하질 않나, machine gun을 '기관포'로 번역하질 않나, air cavalry를 '공수기갑사단'으로 번역하질 않나... 

졸역에 분개하는 것은 상품으로서의 번역물을 돈 내고 사는 소비자로서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한다. 필자 역시 졸역을 두둔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번역으로 돈을 받는 입장이 되고 나니, 즉 업계에 몸을 담고 보니 왜 많은 팬들의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이런 졸역들이 계속 양산되는지 그 근본적인 문제가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이 글에서는 그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군사물을 번역할 번역가들에게 [군사영어사전]을 때려가면서 외우게 해도 졸역 문제는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살짝 다른 얘기지만 논리학에서는 상대방의 논리의 헛점을 공격할 때 숨은 전제를 찾으라고 가르친다. 시선을 졸역을 비판하는 우리 소비자들로 돌려서, 졸역 비판의 숨은 전제를 한번 찾아보도록 하자. 그 숨은 전제를 알면, 과연 우리가 번역 과정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보통 "원문 A의 번역문 a는 오역, 즉 번역사의 이런저런 역량의 한계로 벌어진 잘못된 번역이야."라는 말을 할 때 깔고 있는 숨은 전제는 다음 3가지이다. 


1. 모든 원문은 흠이 없을 것이다(즉 적절한(?) 번역 교육을 받은 사람은 물론 우리같은 소비자도 누구나 완벽하게 해석할 수 있는 문장이다).

2. 모든 번역사는 적절한 번역 교육을 받았으며 그 능력이 검증된 엄선된 인원일 것이다(그러므로 설령 자신이 모르는 분야더라도 조금만(?) 노력하면 오역의 가능성을 줄이거나 없앨 수 있을 것이다).

3. 번역문은 충분한 교정과 교열을 거쳐 최종소비자에게 전달될 것이다(그러므로 실수는 전적으로 번역사의 몫이다). 


...다년간 번역 밥을 먹어온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위의 숨은 전제 3개는 모두 틀렸다. 아니, 엄밀히 얘기한다면 '항상 참인 것'은 아니다.   

우선 원문부터 보자. 한국인이라고 누구나 한국어를 유창하고 논리정연하며 세련되게 하지는 못하듯 외국어도 마찬가지이다. 필자의 경험을 살짝 보탠다면, 특히 원저자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제3국 출신인데도 억지로 영어로 글을 쓰려 하며, 게다가 현학적인 태도를 갖춘 이공계 학자라면, 그가 쓴 문장이 한 문장당 너댓줄은 족히 넘으며 주어와 동사 위치도 불분명한 난문이 될 확률이 높은 것은 너무나도 뻔하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반대로 제대로 된 언어 교육을 받지 못한 하층민 출신의 필자가 쓴 원문도 난문이 될 확률이 높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원저자라는 범주에는 대통령부터 거지까지 모든 사회계층이 다 망라된다. 

게다가 오직 문자, 즉 언어적 요소로만 이루어진 '글'이라는 매체는 비언어적 요소가 포함된 '말'에 비해 맥락이 상당히 결여되어 있다. '말'은 표정이나 음고 등의 비언어적 요소를 통해 언어적 요소를 보충해줄 수 있다. 그러나 '글'은 그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백지 위에 쓰여진 "너를 사랑해."라는 문자는 누군가의 간절한 사랑고백일 수도 있지만 취객의 낙서일 수도 있다. 다른 설명이 없는 한 그것이 둘 중에 어느 것인지, 혹은 다른 맥락에서 적힌 것인지 알 방법은 없다. 글이 문법적 타당성이 결여된 난문이나 비문일 경우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즉 번역사가 접하는 원문 자체에 이미 심각한 난문과 비문이 존재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고, 그 맥락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는 상태에서 이를 제대로 번역하기란 실로 코미디언이 제멋대로 지어내 떠드는 마법의 주문을 속기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이다(속기도 '말이 되는 말'만 기록 가능하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까일 것이 번역사와 번역교육이다. 

우리 생활 주변의 여러 산업분야의 전문인력 중에는 의외로 철저한 전문직업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다. 의사, 약사, 변호사, 제빵사, 요리사 등등등... 많은 직종이 높은 수준의 교육 없이 누구나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원론적으로는 번역사도 이러한 범주에 속해야 한다. 나중에도 자세히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번역은 사실 언어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언어 이면에 있는 지식과 사상, 감정을 옮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나 비극적이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나 '외국어 좀 되면(아니, '토익 900 좀 넘으면'이라고 하는게 더 와닿으려나?), 혹은 외국에서 좀 살다 오기만 하면' 그 어떤 분야라도 능숙히 번역이 된다고 다들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더욱 기가막힌 것은 번역사를 지망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착각의 늪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비극적이게도, 우리나라는 번역사를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길러내는 시스템 자체가 아예 없다.

이웃나라 독일의 경우, 이미 고등학교에서부터 번역을 가르친다고 한다. 쓸만한 언어적 재능은 이미 청소년기부터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에서 번역능력을 검증하는 시험을 치며, 합격한 자에게는 다른 기술자격증처럼 번역자격증도 발급해 취업에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다. 이러한 제도와 정책의 이면에는 학자들이 체계적으로 연구한 번역 이론도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높은 언어적 고립도로 인해 어쩌면 독일보다도 우수한 번역사가 더욱 절실히 필요할 우리에게는 앞서 말한 어떤 것도 없다.

설마 몇개 일류 대학에 설치된 통번역대학원이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번역 교육 기능을 훌륭하게 수행해 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꿈 깨시라. 우리나라에서 요구하는 번역사 수에 비하면 거기 졸업생들 수는 그야말로 코끼리에 비스켓이다. 그리고 외국에서 고등학교때부터 가르치는 것을, 학부 졸업한 성인들 대상으로 아주 비싼 등록금 받아먹어가면서 가르치는 걸로 경쟁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이미 넌센스다. 그리고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그리 교육내용이 충실한 것 같지도 않다. 필자 역시 모 대학 통번역대학원 시험을 보면서 그곳 교수진들의 수준이 대강 어떤지 눈에 보이더라.

매일 타고 다니는 버스나 전철, 택시를 운전하는 기사분들도 해당 면허는 물론 여러가지 교육을 받고 관문을 통과해야 그 일을 할 수 있는데, 과연 번역일이 어떤 정규적 교육과정이나 체계화된 이론과 노하우도 없이 공인외국어 시험성적표 하나만으로 해내갈 수 있는 일일까. 판단은 스스로 해보시길.


그래도 여기까지는 기반을 잘 안닦아놓은 사회 탓이라 치자. 그러나 제 얼굴에 침뱉는 격이 될 지언정 번역사 지망생들의 형편없는 정신자세 또한 까지 않을 수가 없다. 

미천한 경력이지만 그래도 몇 권의 책을 내다보니, 간혹 이 일을 하겠다는 지망생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들의 자세는 어떤 직업에 입문하겠다는 사람의 자세치고는 너무나도 안이하고 수동적이기 그지없다.

그런 사람들이 처음에 하는 소리가 십중팔구는 이거다.

"번역에 '관심'이 있는데요..."

아놔, 관심? 다른 직업 선택하는 사람들도 이런 맥빠지는 말을 쓰던가? 왜 번역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할 사람 같은, 번역 말고는 잘 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같은 기백이 없는 거냐고~!

그리고 무슨 책을 번역하고 싶냐고 물어보면 이 역시 맥빠지게도 십중팔구는 동화 아니면 처세서다. 아니, 세상에 책이 그것밖에 없나? 요즘 아무리 출판시장이 죽었다고는 하지만 출판사라고 그런 책만 내지는 않는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낸다. 그런데 지망생들은 동화 아니면 처세서 번역 정도밖에 할 심적 물적 준비밖에 되어 있지 않다. 그런 애들한테 [콜*스*윈*] 같은 책을 맡기니 릿지웨이가 공군 소속이었다는 황당한 번역이 나오는 것이 아니겠나? 왜 훨씬 다양하고, 특화되고, 해당분야의 명저, 걸작으로 통하는 텍스트를 멋지게 번역해보고 싶다는 생각들을 안 하고, 그에 필요한 준비도 안 하려는 것일까? 제대로만 해낸다면 프리랜서, 즉 1인사업자로서 자신의 주가도 덩달아 오를텐데 말이다.  

제대로 닦여있지 않은 번역 교육 시스템, 그리고 번역이 언어가 아닌 지식과 사상을 옮기는 점을 도외시한채 자신만의 분야 개척에도 관심없고 그저 쉬운 것, 돈 좀 되는 것좀 잡아서 편하게만 일하려는 지망생들...

상황이 이렇기에 해당분야의 매니아들이나 전문가가 보면 혀를 끌끌 찰, 경우에 따라서는 중학생 수준의 영어실력을 가진 사람이 봐도 혀를 찰 한심한 번역들이 납품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문제를 삼을 것은 바로 번역물을 접하는 '고객'의 태도이다. 다만 이 고객은 최종소비자가 아닌, 돈을 내고 번역물을 발주하는 위치에 있는 개인 또는 단체를 가리킨다. 

어떤 상품이나 서비스를 돈을 내고 사는 위치라면, '우수한 품질'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 가능한 거래처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 나라의 번역 시장에서만큼은 '우수한 품질을 턱없이 싼 가격'으로 사려는 고객, 또는 '품질은 어찌됐든 턱없이 싼 가격'만을 강조하는 고객이 다른 곳보단 좀 많은 것 같다. 그 극단적인 사례가 일당 35,000원에 통번역요원을 모집한 모 공공기관의 작태이다. 통역사 하루 부려먹으려면 필자같이 가난한 개인도 일당 최소 15만원은 불러야 사람이 온다.

물론 번역사를 양성하는 시스템이 부재하고, 따라서 번역이 전문기술이라는 인식도 부재한 탓에 벌어진 현상이라고 짐작은 간다. 아주 조악한 표현을 쓰자면 "니가 잘하는지 어떤지도 모르겠고, 토익 만점 맞은 우리 딸내미도 좀만 가르치면 너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돈 많이 줘야 돼?" 하는 주의로 무장한 고객들이 꽤 많을 것 같다. 착각은 자유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번역은 절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게다가 돈 값어치만큼만 일하려는게 사람의 심리이고, 그 심리는 번역물의 품질에 그대로 반영된다. 당장 여러분 같은 경우만 해도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월급을 5개월쯤 연속으로 체불하거나 갑자기 50%쯤 인하해 버리면 즐겁게 일할 맛이 날까?

고객들이 번역사를 보는 안목이 모자란 것은 또 다른 곳에서도 드러난다. 1년에 원고지 2,000매 이상의 책 50권 이상(그것도 중세 서정시에서 우주 물리학을 아우르는 다양한 장르의...)을 혼자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루에 무려 300매 이상 꼴이다. 그것도 쉬는 날 전혀 없이. 필자 같은 경우 컨디션 좋은 날에도 하루에 원고지 150매를 넘기기 힘든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저 많은 분량과 다양한 장르를 혼자서 소화했다고 주장하는 번역사가 존재한다. 그의 명성이 실은 허명일 소지가 높은데도 불구하고, 출판사들은 그에게 일을 계속 갖다 맡긴다. 허명이 자산이 아닌 부채라는 점을 인식 못한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감수 및 편집에도 인색한 고객들이 많다. 여러 번역서들을 보다 보면 번역사의 오류로 인한 '오역'과 편집자의 오류로 인한 '오식'을 분간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바람이 프랑스어오는 곳에서"같은 문장은 오역이 아닌 오식이다(물론, 사정을 좀 모르는 분들은 이런 것까지 모두 오역으로 잘못 생각하시고 번역사에게 책임을 전가하시겠지만). '불어'를 '프랑스어'로 이른바 '묻지마 일괄수정'하면서 생긴 오식인 것이다.  

이는 감수 및 편집 인력에 대한 교육 및 투자의 부족에다가, 해당 인력들의 전문성과 열의 부족이 겹친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이스라엘 수상 아리엘 샤론이 여자인줄 아는 출판편집자가 있다면 곧이 들으실런지? 번역사가 최소한 오타는 없이 만들어 보낸 원고를 문장 다듬겠다고 제멋대로 칼질하다가 문자 그대로 3류 주간지 수준의 편집미스를 저지르는 편집자도 있고, 알아보기 쉽게 엑셀로 만들어 보낸 표를 보고도 제 위치에 끼워넣을줄도 모르는 편집자도 있다. "국민학교 어디 나왔냐"고 그들에게 묻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모두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이 다듬은 원고의 오류가 모두 번역자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순진한 생각이다.

잡설이 길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된 번역을 보고 싶다면 그에 걸맞는 사회적인 투자를 선행하라.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과학기술이나 문화의 중심지라면 모를까, 지식정보시장을 번역을 통한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현재같은 주먹구구식 번역으로는 지식기반사회, 정보강국은 한 마디로 공염불이다. 철길도 제대로 안 닦여 있고, 그 철길을 빨리 달릴 수 있는 열차도 없으면서 "왜 우리나라에서는 일본 신칸센처럼 빠르고 쾌적한 기차여행을 못하냐"고 따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일본이 정부 주도로 번역에 투자해 동북아의 지식강국으로 발전한 사례를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된다. 

작가의 이전글 출판 산업 종사자들은 <루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