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텍스트어드벤처 - 18
취미가 독서라고 하기에는 좀 문제가 있다. 누가 책은 좀 읽냐고 물어보면 "그럭저럭 읽는 편"이라고 대답하기는 한다. 그래서 무슨 책을 읽느냐는 질문 하면 "이것저것"이라고 답한다.
사실 한 달에 한두 번은 도서관에 간다. 도서관에 가면 한두 시간씩 앉아서 책을 들춰보다가 5권씩 꽉꽉 채워 빌려오기도 한다. 특별히 살 책이 없어도 서점이 보이면 잠깐이라도 들르는 편이다. 한 번은 동네 서점에 며칠에 걸쳐 들르며 책 한 권을 다 읽은 적도 있었다. 딱 한 번, 아마도 백수라 시간이 남아서였던 것 같다.
평소에는 한 달에 한 권이나 제대로 읽을까 싶다. 물론 책을 사는 건 더더욱 뜸하다. 가끔 주위에 책을 자주 사거나 블로그에 주기적으로 리뷰를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다. 대단한 독서량과 그를 뒷받침해줄 시간적 여유, 체력, 자본, 공간 등을 영위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경이롭다.
삶에서 가장 많이 책을 접한 건 헌책방 알바를 하던 때였다. 최근 몇 년간 알라딘 중고서점이 많이 생겼지만 그때는 오랫동안 지역에 자리 잡은 몇 곳이 그나마 헌책방의 명맥을 잇고 있었다. 아직도 그렇지만 일반 서점은 휘청거렸고, 유어마인드나 땡스북스같은 독립서점이나 큐레이팅 서점이 막 시작되던 시기였다. 동네 헌책방이었지만 아는 사람들은 알고 물어물어 찾아오는 곳이었다. 규모도 제법 됐다. 실제로 손님들에게 공개된 서점 외에 5~6배 규모의 서고가 따로 있는 곳이었다. 헌책방이라 같은 책이 여러 권있거나, 새책은 드물었지만 어지간한 도서관 장서 규모와 맞먹었다.
온라인 판매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고에 있는 책은 모두 DB 정리가 돼 있었다. 새 책이 들어오면 DB 정리 작업을 하고, 주문이 들어오면 서고에 가서 책을 꺼내오는 게 내 일이었다. 새 책이 들어오는 날은 컴퓨터 앞에 앉아 하나하나 들춰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DB 입력을 하면서 관심이 가는 책은 일부러 입력을 뒤로 미루고 하나하나 쌓아두면서 하루 종일 구경하기도 했다.
서고는 나에게 별천지 같은 공간이었다. 바쁘지 않으면 서고 정리를 핑계로 서고에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도서관이나 서점과는 달리 입고된 순서대로 책을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칸안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재밌었다. 귀한 대접을 받는 유명 작가의 초판본과 폐지로 가도 제값을 받기 힘든 최신판 MS-DOS 익히기 같은 책이 사이좋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검색만으로는 찾을 수 없는 기이한 책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좋았다. 일상에서는 정리가 안 된 상황 속에 놓이는 걸 싫어하는 편인데, 책만큼은 예외라는 점이 지금도 신기하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 멋모르고 도서관을 갔을 때도 그랬다. 어릴 때는 집에 있는 동화책이나 위인전이 내가 아는 세상 책의 전부였다. 읽은 책이 곧 아는 책인 세계에 살았다. 그러다 도서관에 갔더니 이런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매일 백반만 먹다가 난생처음 뷔페에 가서 정신 못 차리는 사람을 상상하면 비슷하겠다. 정해진 시간에 내가 읽을 수 있는 총량은 정해져 있으니 서가를 돌아다니며 제목만 보고 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그렇다. 얼핏 보면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읽을 책을 찾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이책 저책을 보고 있을 뿐이다. 앞서 다른 글에 쓰기도 했지만 다른 지역이나 해외에서도 기회가 되면 도서관이나 서점을 꼭 들르는 편이다. 그나마 영어면 다행이지 읽지도 못하는 책을 뭘 그렇게 보냐고 물어도 딱히 대답할 말은 없다. 그냥 책만 봐도 재밌는데, 다른 나라 책은 더 재밌다.
그럼 매번 도서관에 갈 때마다 다섯 권씩 왜 빌려오느냐. 나도 가끔 한 권쯤은 읽고 싶다. 그리고 사실 빌려오기만 해도 뿌듯하다. 다만 집에서도 표지만 보다가, 목차만 보다가, 한두 장 읽는다. 그러나 반납일이 다가오면 그저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하는 마음으로 도서관에 돌려보낸다.
그러니까 나는 독서라기보다 관(觀)서를 하는 사람이다. 독서가는 아니지만 책은 좋아하니까 '호서가'라고 해야 할지. 아직도 독서를 대신해 정확하게 취미를 표현할 단어를 찾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