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프롤로그] 속초, 나를 머물게 하다

by 이엔 지민

속초로 이사 온 첫날 밤, 짐도 풀지 못한 채 쓰러져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강렬한 빛에 눈을 떴다. 홀린 듯 창가로 다가갔다. 온 세상을 진홍빛으로 물들이며 붉은 해가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큰맘 먹고 정동진행 기차에 몸을 실어야만 볼 수 있던 그 장엄한 풍경이, 지금 내 방 창문 너머에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져 있다.

사실 시작은 아주 단순했다. 몇 년 전 사두었던 호텔형 레지던스를 이제는 남의 손이 아닌 내가 직접 운영해 보고 싶었다. 업무차 내려온 길, 인수 작업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다. 더 할 일도, 만날 사람도 없었다. 무작정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가까운 속초해수욕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까지 왔는데 바다를 보지 않고 돌아가는 건 속초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멀리서는 짙은 먹빛을 띠던 바다가 내 발밑으로 다가오자 한없이 투명해졌다. 무릎을 굽혀 그 투명함 속을 들여다보았다. 모래와 작은 조약돌이 선명하게 보였다. 파도가 밀려왔다 빠져나갈 때마다 모래알이 “쏴르르” 굴러가는 소리를 냈다. 신발을 벗어들고 물기 머금은 모래 위를 걷기 시작했다. 파도가 밀려 나갈 때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마사지하듯 살갑게 부비며 빠져나갔다. 그 간지러운 감각과 함께, 복잡했던 머릿속의 무게도 스르르 빠져나가는 듯했다. 다리와 마음이 동시에 홀가분해졌다.

그 길로 고속버스 앱을 열어 예매해 둔 표를 취소했다. 그리고 근처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다. "바다가 보이는 집, 있습니까?" 처음 보러 간 집의 통창 너머로 푸른 바다의 윤슬이 반짝거렸다. 주방 창문으로는 도시를 수호하듯 버티고 있는 울산바위가 병풍처럼 서 있었다. 바다와 산이 앞뒤로 호위하는 집. 나는 더 고민하지 않고 결정했다.

누군가는 너무 가벼운 결정이라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삶은 한 번의 긴 여행이고, 모든 장소는 잠시 머무는 정거장일 뿐이다. 오래 쌓인 묵은 관계, 의무감으로 반복되는 만남에서 한 발짝 물러나고 싶었던 나에게, 이 즉흥적인 선택은 너무나 가치있는 결정이었다. 오롯이 나를 돌보며 바다를 바라보고,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바다와 산이 공존하는 이곳 속초에서 2년쯤 살아볼 생각이다. 그 후에는 바다를 따라 더 남쪽으로 내려갈지도 모른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이곳에 여행자로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발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던 모래알처럼 가볍게, 속초와 함께 하는 여정만큼은 진하게 누리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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