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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달걀

이제 미국인을 위해 악마의 달걀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by Boradbury

오랜만이었다. 수육을 준비하겠다고 큰 소리쳤는데 손님상을 차린지 벌써 일 년이나 공백기가 있어서인지 손이 영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메뉴를 고르면서도 얼마나 많은 레시피를 찾아봤는지 모른다. 전에는 대충 해도 스무 명 분은 거뜬히 해 내던 손이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금세 실력이 형편없어진 건지. 난감하다.

“저도 뭘 좀 준비해 갈까요?”

“아이고, 그러지 마세요. 임산부는 와서 맛있게 먹어주기만 해도 고마운 거예요.”

그 말을 하지나 말 걸. 고깃덩어리를 건져내다가 미끄러져 다시 냄비 속으로 풍덩 빠져 버렸다. 가스레인지와 앞치마로 기름진 국물이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렸다. 휴대전화 시계를 확인하니 삼십 분 남짓 남았는데 총체적 난국이다. 아예 큰 집게를 꺼내어 고깃덩어리를 다시 건졌다. 하지만 그것을 반으로 잘랐을 때, 나는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겉보기엔 괜찮았는데 안이 완전히 익지 않아서다. 다시 냄비로 사라지는 고깃덩어리를 보며 마음이 더 발을 동동 구른다.

체반에 받쳐둔 절인 배추를 힘주어 짰다. 고작 한 포기 했을 뿐인데 이번 배추가 실하고 좋아서인지 양이 꽤 된다. 그래도 겉절이엔 나름 자신있다고 생각하며 큰 그릇에 배추와 각종 양념을 함께 넣고 버무렸다. 겉절이엔 참기름을 더할 수 있어 좋다. 그 마지막 비법이 온 부엌과 거실을 고소하게 만들어 입맛을 돌게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맛이 제법 괜찮다. 큰 접시에 겉절이를 둘로 나누어 담으며 그제서야 좀 마음이 놓인다. 돼지고기는 어떻게 요리해도 맛이 없지는 않으니 결국 수육의 성공은 곁들어 먹을 겉절이가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지난번 엄마가 가져다준 한국 고춧가루가 덜 매워서 안심이 됐다. 브라이슨이 먹기에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

소연과 브라이슨은 한국에서 만나 결혼했고, 미국 텍사스를 거쳐 이곳, 시애틀에 정착했다. 양가 식구들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가까이 지내는 한국인은 별로 없다고 했다. 꽤 오래 전 교회 모임에서 알게 된 그들은 그때도 임신을 기도 제목으로 올리며 애타게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서 인공수정으로 예쁜 딸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기쁜 소식을 듣고 내가 임신했을 때를 떠올렸다.

나는 엄마를 닮아 입덧이 없었다. 좋은 일이기도 했지만, 왠지 억울했다. 남편에게 먹고 싶은 것을 사달라거나 새벽에 갑자기 요리를 해 달라거나 할 수 없어서였다. 그래서 거의 출산일이 다 되었을 때, 새벽 세 시에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웠다.

“나 김밥 먹고 싶어.”

“이 야밤에 어디서 김밥을 사 와? 여기서 한국인 줄 알아? 여긴 이십사 시간 하는 편의점 같은 건 없다고.”

야속하게도 남편은 신경질을 내고 다시 잠들어 버렸다. 이 억울한 이야기를 들은 남편의 친구가 조언했다.

“다음부터 와이프가 뭐 먹고 싶다고 하면 비슷하게라도 대령해야 하는 거야.”

며칠 후, 난 다시 새벽에 남편을 깨워 김밥이 먹고 싶다고 했다. 이번엔 남편이 부엌으로 가서 뭔가를 만드는 것 같더니 방으로 돌아왔다.

“자, 여기 김밥.”

남편이 들이민 큰 쟁반엔 자르지 않은 조미김 한 장에 밥을 얹고 가운데에 김치 한 줄을 넣어 대충 둘둘 말은 김밥 하나가 썰지도 않은 채 덩그라니 놓여져 있었다. 서러운 감정이 올라왔지만 그때 그 김밥은 왜 맛있었는지 모르겠다.

소연이 힘들게 임신했으나 미국인 남편에게 한국 요리를 요구하는 건 힘들었을 것이다. 심지어 노산이라 여러 문제도 있어 워싱턴 대학 병원에서 스페셜리스트를 본다고 했다. 그래서 고른 메뉴가 수육이었다. 단백질도 충분히 섭취할 수 있고, 참기름 향 머금은, 막 버무린 겉절이는 그 냄새만으로도 행복해질 것 같았다. 소연도 저녁 메뉴를 듣더니 너무 기대된다고 채팅창에 웃는 이모티콘을 올렸다.

드디어 잘 익은 고깃덩어리가 도마 위에서 일정 간격으로 줄맞추고 접시 위로 누웠다. 시간 맞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도착했다. 브라이슨이 한국 음식을 잘 먹을까, 고민하다가 그것보다 더 큰 걱정이 훅 올라와 내 가슴을 뛰게 했다. 언어의 장벽은 여전히 내 인간관계에 큰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큰 아이를 데이케어에 보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집 부근의 교회에서 운영하는 데이케어를 찾았다. 한국 교회였지만, 다양한 인종의 아이들이 섞여 있었다. 한국에서 온지 일 년 정도 밖에 안 된 나는 한국인 선생님이나 부모들과는 잘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외국인들과는 방긋 웃고 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한 미국 엄마가 자기 집에서 여는 파트락 파티에 다른 엄마들을 초대했다. 엄마 역할을 잘 해 보고 싶었던 나는 하지도 못하는 미국 음식 레시피를 뒤졌다. 그러다가 ‘악마의 달걀’이라는 요리가 눈에 띄었다. 이름은 좀 험악해도 삶은 달걀을 반으로 잘라 노른자와 다른 재료를 섞은 후 예쁘게 상투과자처럼 짜 넣은 요리라서 보기에도 좋았다.

달걀을 삶고, 레시피대로 노른자를 따로 분리해 그릇에 담아 분량의 재료를 섞고 짤주머니에 넣어 모양을 만들어 올렸다. 그런데 마음처럼 모양이 예쁘게 나오지 않았다. 농도가 안 맞았는지 상투모양으로 봉긋이 서지 않고, 무너져 내렸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별 수 없이 그 위에 그냥 파프리카 가루를 뿌리고 뚜껑을 덮었다.

파티에 참석한 엄마들 중 한국인은 나 하나 뿐이었다. 그들은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지 아주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대화했다. 한참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있는 내게 호스트인 엄마가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한국에서 왔지요? 거기 북한 때문에 위험하지 않나요?”

지금처럼 한국 문화의 르네상스 시기였다면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겠지만 당시에 한국이란 나라는 그저 북한에 붙어 있는, 언제든 전쟁이 날 수 있는 위험한 지역일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위험하진 않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후로 아무도 내게 더는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음식을 먹을 때도 그들은 내가 만들어 온 악마의 달걀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그냥 스쳐 지나갔다. 모양이 예쁘지 않아서 그랬을까, 아니면 미국인도 아닌 한국인이 만들어온 미국 음식이 미심쩍어서였을까, 어느 쪽이든 창피했다. 그 후로 나는 엄마들의 모임에 가지 않았다.

브라이슨은 익숙하게 젓가락과 숟가락을 각자의 자리에 나눠 놓았다. 그리고 기도하자 마자 수육과 겉절이를 입안으로 쓸어넣었다.

“소연 씨, 브라이슨이 한국 음식을 잘 먹네요?”

“그럼요. 저보다 한국 음식을 더 잘 먹는걸요.”

그러고보니 소연은 생각보다 많이 먹지 못했는데 브라이슨은 벌써 두 그릇째 먹고 있었다. 겉절이가 맵지 않냐고 물으니 그는 매운 걸 소연보다 더 잘 먹는다고 자랑했다.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브라이슨에게 고맙기도 했지만 그 다음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영어로 대화하는 것은 미국에서 오래 살아도 여전히 어려운 숙제 같았다. 그래서 어색하게 소연에게만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브라이슨은 가끔 소연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물어보다가 점점 조용해졌다. 한국인들끼리 모여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이 자리에 그는 이방인으로 앉아 있었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요.”

개렛은 인터넷에서 한국 교회를 검색해 전화했다. 그는 다큐멘터리 감독인데 요즘 한국 문화가 유명해지며 전에는 일본어와 중국어를 배웠지만, 이제는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걱정되어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한국어가 배우고 싶으면 과외하는 선생님을 찾거나 한글학교도 있었을텐데 왜 하필 한국 교회를 찾아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목사님은 그가 한국에 매우 호의적이라며 교회 모임에 초대했다. 그 모임에서 영어가 불편한 사람은 또 나 한 사람뿐이었다. 난 개렛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괜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는 가끔 사람들이 질문해 줄 때만 대답할 뿐 먼저 입을 떼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우리의 이야기만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한국 음식을 잘 먹기도 했지만, 남은 것을 포장해 주면 거절하지 않고 챙겨 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가 그러는 데에는 가족 배경도 한 몫을 했다. 그는 형제, 자매가 아주 많았는데 위로도 네 명, 아래로도 네 명이다. 그런데 그가 데려온 동생들이 그와 피부색이 달랐다. 모두 입양된 아이들이었고, 막내는 다섯 살이란다. 그의 아버지는 이탈리아인, 어머니는 멕시코인이었는데 직접 낳은 아이들은 개렛까지다. 이렇게 국적이 다양하게 섞여 있다보니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게 어색하지 않았나 보다.

개렛은 아직 한국어로 자유롭게 말하진 못하지만 꾸준히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나온다. 먼저 인사해 주고, 한국 문화에 관해서도 많이 공부하고 이야기 나눈다. 어떨 땐, 한국인인 나보다 더 요즈음의 한국에 관해 더 많이 아는 것 같아 신기하다.

소연과 브라이슨도 매주 우리 집에 온다. 매번 한국 음식을 준비하지만 항상 맛있게 두 그릇을 비운다. 한국어는 여전히 못한다. 그런데 우리가 한국어로 대화할 때 말없이 앉아 휴대전화만 쳐다보는 브라이슨을 바라볼 때마다 내 마음이 오래 전 엄마들의 모임 때처럼 불편해진다. 어쩌면 브라이슨도 개렛도 그 때의 나처럼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고, 그들의 문화에 끼지 못하는 것이 상처가 되지 않을지 염려되어서다. 그리고 반대로 그때의 미국 엄마들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 그들도 어쩌면 나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어의 장벽 때문에 더는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고, 미안한 마음에 내 눈도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을 것이다.

“요즘 보잉은 상황이 어때요? 저번에 사고난 건 무엇 때문에 그런 거래요?”

소연과 이야기 나누다가 얼마 전 읽은 뉴스가 생각나서 물었다. 소연과 브라이슨이 보잉 공장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주제를 끌어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브라이슨이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아, 그건 문 쪽의 볼트를 제대로 조이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그가 영어로 답했기 때문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한국어를 이해했을리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 말을 이해해서 딱 맞는 답을 한 걸까 의아해 하고 있을 때 소연이 그 답을 알려줬다.

“아, 브라이슨이 이번에 새로 산 휴대전화에 이 기능이 있더라고요.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이 다 번역되어 계속 올라오거든요. 실시간으로요.”

브라이슨은 우리에게 자랑하듯 자신의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줬다. 그러니까 우리가 대화하는 것을 화면으로 보고 있다가 자기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바로 영어로 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후로 모임 때마다 우리는 티브이에 그의 휴대전화를 미러링해서 올려 놓은 후 이야기한다. 그러면 그가 하는 말도, 우리가 하는 말도 화면에 번역되어 뜬다. 신세계다. 그동안 날 힘들게 했던 장벽이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모두 무너졌다.

이제 미국인을 위해 악마의 달걀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수육과 겉절이도 잘 먹는 브라이슨과 개렛을 보며 그들과 나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만들어본 적이 없는 그 달걀 요리는 날 창피하게 한 악마의 요리였다. 그 이름만큼이나 확실히 나를 곤란하게 했다. 그렇지만 긴 시간이 흐르고 악마는 사라지고 다음 번엔 한국인의 좋아하는 반찬, 달걀 장조림을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브라이슨과 개렛은 분명히 그것을 맛있게 먹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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