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뭐 하는 거야? FKJ의 아내 이름을 불러 보는 거야.
세상이 쪼개졌다. 한 개의 세상으론 부족하다. 다중우주, 평행우주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의 우주에 여러 명의 내가 산다. 그렇다면, 도플갱어나 쌍둥이 혹은 복제인간을 뜻하는 건가. 그것 또한 아니다.
엄마랑 같이 가고 싶은 콘서트가 있어. 둘째 아이가 티켓을 살 수 있는 사이트 링크와 함께 문자를 보내왔다. 아이의 방에 걸려 있던 앨범과 함께 그 음악가의 이름이 떠올랐다. FKJ.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 JYP를 떠올리며 이름 약자일 거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먼 곳에서부터 이 땅 위로 떨어진 운석 조각처럼 작은 섬광을 일으켰다. 상상하지 못했던 다른 세계의 이름, French Kiwi Juice. 그는 스스로 자신에게 ‘프렌치 키위 주스’라고 이름 붙였다.
아직 그 섬광이 사라지기도 전에 또 하나의 운석이 떨어졌다. 그의 음악 장르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당장 휴대전화를 열어 검색했다.
리듬 앤 블루스, 프렌치 하우스, 뉴 재즈, 댄스/일렉트로닉. 그는 이름뿐 아니라 추구하는 음악 장르도 무척이나 난해하고 복잡했다.
요즘 들어 삶을 더 단순화시키려는 내게 이건 마치 복잡한 휴대전화 패턴 같다. 세모로 연결해 봐도, 네모나 별모양으로 그어봐도 죄다 오답이다. 어쩌면 각진 패턴 속에 동그라미로 연결해야 하는 창의력을 발휘해야 할지도 모른다. 엄마, 이게 이 시대의 문화야. 아이의 말에 내 세상은 또 다른 우주로 멀리 사라져 버렸다.
콘서트장에 일찍 도착해 간만에 사람 구경을 했다. 시애틀에 살면서 특별한 때, 장소가 아니면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요란한 장소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정장 차림의 젊은 동양 남자, 나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중년 커플, 부모와 자녀, 요란하게 꾸민 청소년들. 연관성 없는 인간 군상. 그들은 간단한 음료와 음식을 먹기도 했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기도 했다.
콘서트가 시작되자, 분위기를 띄울 무명 음악가가 나와 노래와 연주를 시작했다. 그는 혼자 루프 스테이션을 사용해 차례로 음을 쌓고, 거기에 노래를 입히는 방식으로 음악을 만들었다. 이게 바로 나야, 하는 것처럼. 여러 세션을 붙여 표현하던 옛 방식과는 확연히 달랐다. 음악과 노래 또는 그냥 흥얼거림이나 랩을 자유롭게 뒤섞었다. 뒤편엔 뮤직비디오라고 하기엔 시각 예술에 가까운 영상들이 박자에 맞춰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이 모두가 복잡했지만, 나름 연결성이 느껴져서 전혀 어색하거나 불편하진 않았다.
콘서트가 시작한 지 1시간이 지났지만 FKJ는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분위기를 띄우던 무명 음악가의 무대가 끝나고도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난 조금씩 그의 예의 없는 공연 방식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와는 다르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굉장히 여유롭게 콘서트를 즐기고 있었다.
잠시 후 불이 꺼지더니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불 켜는 소리가 들리고, 그가 등장했다. 그는 연극 무대에 선 배우가 되어 자신의 집 거실처럼 꾸며진 무대에 차례로 불을 켜 나갔다. 그가 스위치를 하나씩 올릴 때마다 무대에 놓인 스탠드에 불이 들어왔다. 배경엔 정글 같은 영상이 흐르고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장내에 퍼져갔다. 또한 그는 레코드판을 꺼내어 플레이어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대표곡이 잔잔하게 모든 공간을 서서히 채워갔다. 그리고서 그는 조심히 키보드에 앉아 독백 같은 연주를 시작했다.
그는 이곳이 자신의 집 거실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지 무대 위를 매우 자유롭게 움직여 다녔다. 천천히 걷고, 키보드를 연주하다가 색소폰을 연주하고, 또다시 기타를 연주했다. 어떤 곡을 연주할 땐 클래식 세션이, 다른 곡을 연주할 땐 전자 악기 세션이 나와 함께 연주를 이어갔다. 노랫말이 있는 곡도 있고, 없는 곡도 있었다. 앞에서 연주하던 무명 가수와 같은 방식이었다. 그들에게 노랫말은 필요에 따라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었다. 그냥 어떤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 가는 데 필요한 요소들일 뿐이었다. 그들은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몸은 하나지만 꽤 많은 그가 무대 위에서 분열했다.
분열하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대 위 소파에서 책을 읽는 한 여자. 그녀는 집안에서나 입을 법한 편한 옷을 입고 소파에 앉았다가 누웠다가 엎드리기를 반복했다. 심지어 맨발이었다. 콘서트의 중반부까지도 그녀가 왜 그곳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아이가 내 귀에 속삭였다. 그녀가 FKJ의 아내라고. 그녀 또한 음악가라고. 그래서 그녀의 이름을 물었는데 아이가 알 수 없는 손짓을 했다. 무언가를 그리는 것처럼.
처음엔 손을 동그랗게 말아 양쪽으로 괄호가 번져가는 모양을 만들더니 그다음엔 가운데에 원을 만들어 넣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란다. 굳이 쓰자면 ((( O ))) 이다. 사람 이름에 문장부호라니.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 땅 위로 떨어진 운석 조각 중 가장 해괴한 것이었다. 물론 그도, 그녀도 원래 이름이 있고, 이 이름들은 활동명일 테지만, 자신을 프렌치 키위 주스라고 명명하는 것도 난해한데 이번엔 문장부호로 된 이름이라니. 아이에게 그럼 이 이름을 어떻게 부르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어깨를 으쓱했다. 이름이란 본디 부르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니던가. 그런데 부를 수도 없는 이름으로 자신을 명명한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그녀는 콘서트 중반부를 넘어 몇 곡 노래를 부른 뒤 다시 소파로 가 앉아서 작은 공책에 뭔가를 끄적였다. 그들은 자유롭게 움직이며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음악, 영상, 조명, 스토리텔링을 통해 종합 예술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그는 다시 불을 하나씩 끈 후 방문을 열고 나갔다. 무대엔 귀뚜라미 소리만 가득했다. 흔히 영화를 종합 예술이라 칭하지만 난 이 공연 또한 종합 예술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발전된 형태의 공연일 수도 있겠다. 더 놀라웠던 건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르고 싶은 대로 불렀고, 표현하고 싶은 대로 표현했고, 보여주고 싶은 것들을 다양한 이름을 붙여 보여줬다.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기엔 매우 복잡했지만 결국 난 그것들을 그렇게밖에 부를 수 없음에 동의했다. 처음엔 무슨 사람 이름이? 무슨 음악 장르가? 했던 난 이제 그 모든 게 타당한 이유와 적합한 이름이었음을 깨달았다.
입을 동그랗게 모아 ‘오’라고 소리를 내며 아주 작게 내던 소리를 조금씩 증폭시켰다. 엄마, 뭐 하는 거야? FKJ의 아내 이름을 불러 보는 거야. 가운데가 O이고, 양쪽으로 소리가 번져가는 것처럼 괄호가 여러 개 붙어 있으니까 혹시 그녀의 이름을 이렇게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내 말에 아이가 놀라운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크게 웃었다.
내 세상이 쪼개졌다. 분열해 나온 또 다른 내게 뭐라 이름을 붙일지, 작은 섬광을 바라보며 스스로 질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