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radbury Nov 28. 2023

보그 78페이지

같다는 건 사실 다른 것이다

    감성이 닿는 곳에 한계가 있을까? 차가운 밤바다, 딱딱한 아스팔트, 체온을 잃은 죽은 이의 손, 형체가 일그러진 심해어. 그것들을 대할 때조차 인간의 입은 시를 읊는다. 머리보다 더 빠르게 인식의 중심을 꿰뚫는다. 인구의 절반이 잠든 시간, 내 뚫린 구멍 속에 자리 잡은 건 다름 아닌 패션쇼였다. 

    장내를 울리는 누군가의 목소리는 몇 가지 단어를 반복적으로 읊었다. 그 박자에 맞춰 모델들이 제법 빠르게 걸어 나왔다. 조명과 무대는 의상을 강조하기 위해 철저히 색을 죽이고, 숨을 죽였다. 

    은회색 철재 바닥은 서서히 밀려드는 파도 같아서 발끝이 시렸다. 그 위로 쓸려오는 모델들은 발광하는 심해어들 같았다. 낯선 듯 낯설지 않은 선과 면 그리고 색의 조화. 그걸 디자인이란 연장으로 아주 잘 조합해 놓았다. 때론 그 조화들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마치 전시장에 걸린 그림 액자들이 차례대로 걸어 나오는 것 같았다. 내 머릿속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카드 병정이 막 떠오를 때쯤 난 조금 현실에 가까워지기도 했다. 

    아직까진 아니다. 내 안의 세포들을 일으켜 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검은 눈동자는 더 큰 자극을 바라는 중독자처럼 모델들이 입고 있는 옷을 삼백육십 도로 샅샅이 훑었다. 그 작업은 기성복을 찍어내는 기계처럼 일정하게 반복됐다. 패션쇼에서 그런 산업의 단면을 보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럼 이젠 감성에 도달했는가? 아직이다. 인간의 눈은 속건성 신소재 같아서 금방 말라버리니 그 목을 축이려면 우물 파듯, 더 깊은 곳까지 땅을 파야 할 수도 있다. 심지어 색마저 어둡고 차가운 패션쇼장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관속에서 꺼낸 듯 굳어있었다. 관찰의 얼굴은 늘 그렇다. 

    반질반질한 패션 잡지 종이는 늘 손끝에서 발광했다. 친구는 그 종이를 잘라 교과서를 감쌌다. 그리고 얇아서 잘 찢어지는 비닐이 아닌, 잘 꺾이지도 않는 두꺼운 비닐을 덧입혔다. 친구의 교과서에선 늘 그림 같은 옷을 입은 모델들이 긴 다리를 쭉 뻗어 런웨이 위를 걸었다. 고작 패션 잡지를 둘러싼 교과서일 뿐이었는데도 반질반질하고 비싼 옷을 입은 그것은 우리 반에서 가장 세련된 물건이었다. 

    옛 추억으로 감성에 도달했는가? 미안하지만 그건 그저 발광하던 것이었지 내 안에 구멍을 뚫을 순 없었다. 그 순간, 은회색 철재 바닥과 이어진 한쪽 벽면이 몸체를 천천히 내려 온전히 바닥으로 사라졌다. 거울인가? 착시가 일어났다. 허공에 보이지 않는 거울이 내걸렸다. 모델 혼자 걷던 런웨이 위에 한 사람이 더 생겨 둘이 함께 걷고 있었다. 분명 그랬다. 

    같지만 다른 존재. 총 예순여덟 쌍의 쌍둥이가 만들어 낸 무언의 감성이 드디어 내 입에서 시가 터져 나오게 했다. 런웨이를 반으로 나눠 두 개의 공간을 만들고, 똑같은 옷을 입은 쌍둥이 모델들이 각각 다른 공간을 동시에 걷게 했다. 그리고 쇼의 중반부를 넘어설 때쯤 그 둘을 막고 있던 벽이 사라지며 메시지가 명확해졌다. 같지만 다름.

    같다는 건 사실 다른 것이다. 이 법칙을 깰 수 있는 건 숫자나 자연법칙 정도가 아닐까. 어쩌면 그조차도 아직 인류가 발견하지 못한 착시는 아닐는지. 모를 일이다. 인간 복제가 가능한 시대라고는 하지만 유전자만 같다고 과연 둘을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복제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은 원래의 인간과 같을 수 없고, 그들의 결정과 생각도 같을 수 없다. 

    이 패션쇼의 기획자인 미켈레는 이것을 ‘유사한 것이 주는 속임수이자, 깨져버린 대칭이 선사하는 환영의 게임’이라고 표현했다. 전위예술이다. 그저 유행을 이끌어갈 패션을 소개하는 자리라고 하기엔 감성의 높은 탑을 뛰어넘는 작품이다. 차가운 밤바다, 딱딱한 아스팔트, 체온을 잃은 죽은 이의 손, 형체가 일그러진 심해어가 모두 모여있는 이 기묘한 곳에서 신의 창조 원칙을 만난다. 내 눈은 다시 쌍둥이 모델들을 삼백육십 도로 훑으며 다른 그림 찾기를 한다. 

    온라인을 떠돌다가 이런 게시글을 만났다. ‘같은 옷, 다른 느낌’이란 제목 밑으로 모 유명 패션 브랜드 드레스를 입은 두 연예인의 사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분명 옷은 같지만 둘의 분위기는 현저히 달랐다. 물론 한 쪽이 옷을 더 잘 소화했다는 말을 붙이기 위한 인형 놀이에 불과하겠지만. 

    맞다. 반질반질한 패션 잡지 종이로 감싼 친구의 세련된 교과서를 내려다보고 있는 나와 내 친구들은 모두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우린 모두 달랐다. 같은 옷을 입고 있다고 해서 같은 사람이 될 순 없었다. 학교가 입힌 공동체 의식 속에서 우린 각자의 색으로 발광하고 있었다. 

    감성이 닿는 곳에 한계가 있을까? 누구나 겪는 공평한 시간 속에서 우린 드디어 감성에 도달했는가. 그래서 우린 달라졌는가. 나만의 다름을 찾아냈는가. 머릿속을 런웨이 삼아 줄지어 걷는 잡다한 생각들을 지우기 위해 난 오늘도 과년호 패션 잡지 속 모델들을 가위질한다.     



작가의 이전글 불편한 노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