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radbury Jan 09. 2024

르 페스탕(Le Festin)

아이가 떠나고, 화이트보드에 적힌 마지막 한 줄을 지운다.

    터키 샌드위치

    

    화이트보드에 적힌 마지막 한 줄을 지웠다. 누군가의 머리털 같은 지우개의 밑바닥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 검은 찌꺼기가 남는다. 깨끗이 지우지 못한 마음은 흔적을 남긴다. 부엌엔 온통 구운 빵의 고소한 냄새, 짭쪼름한 터키 냄새, 고릿한 하바티 치즈 냄새로 가득 차 있다. 그 사이로 토마토 특유의 비릿한 향과 양상추의 상큼한 향이 티 나지 않게 숨어있다. 

    알싸한 새벽 향기가 나던 밤, 휴대전화 저편에서 아이는 알싸하다 못해 씁쓰름한 이야기를 꺼냈다. 습기를 먹은 목소리가 가느다란 진동을 만들더니 내 머리끝에서 찌릿한 전기 반응을 일으켰다. 그 이야기의 끝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순식간에 훅 떨어져 내렸다. 해 주고 싶던 말들이 모두 짤막하게 토막 나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공기가 더, 자꾸 무거워졌다.   

    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온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물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바싹 마른 손이 내 두 손안에서 어색하게 버석거렸다. 전보다 유독 도드라진 손가락뼈들이 힘없이 늘어졌다. 슬프다는 말보다 더 슬픈 말을 찾을 수 없어 가만히 아이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참을 있었다. 

    수제비, 제육볶음, 볶은 우동, 순두부찌개, 고추잡채, 샤부샤부, 차돌박이 로스구이, 삼겹살과 송이버섯구이, 칼국수, 김밥, 떡볶이, 어묵국, 크림 카레 우동과 카레 빵, 떡갈비, 닭개장...... 터키 샌드위치.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화이트보드에 적어 내려갔다. 냉장고에 붙은 화이트보드가 금세 까만 글씨들로 가득 찼다. 매일 다른 음식으로 겹치지 않게 완성된 한 달 치 식단. 사인펜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매일 아침 기도 시간 후에 이어지는 요리는 내게 또 다른 기도 시간이 됐다. 슬프다는 말보다 더 슬픈 말을 찾지 못했는데 이번엔 간절하다는 말보다 더 간절한 말을 찾을 수 없어 다시 슬퍼졌다. 그러다가 다시 슬프다는 말보다 더 슬픈 말을 찾지 못하고, 간절하다는 말보다 더 간절한 말을 찾지 못하고를 반복하는 것처럼 쉬지 않고, 도마 위에서 칼이 식재료를 토막 냈다. 그건 마치 내가 아이에게 하지 못하고 짤막하게 토막 나 공기 중으로 흩어졌던 말들 같았다. 난 그걸 모두 힘겹게 모아 냄비에 쏟아부었다. 혹여나 그것 중 하나라도 수증기가 되어 사라질까 봐 뚜껑을 꼭 닫았다. 

    부엌에서 드리는 기도는 매우 성실하고, 분주하다. 이 기도의 배경 음악으로 Le Festin(르 페스탕)은 매우 적합하다. 문제는 끝났어요. 난 새로운 삶을 위해 상을 차려요. 이 새로운 운명의 생각에 난 행복해요. 

요리의 본질은 무엇일까 물음표 하나를 불 위에서 태우며 답을 구한다. 둥글게 말린 끝이 가장 먼저 타 없어지더니 물음표는 이내 느낌표가 된다. 드디어 그을린 내 마음 한편에서 음성이 들린다. 인간이 가장 성실하게 할 수 있는 이타적 행위. 우린 그걸 요리라고 부른다고. 

    화이트보드 위의 까만 글씨가 절반쯤 지워졌을 때, 아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겨우 스치듯 말했다. 맛있는 음식해 주셔서 감사해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등을 돌린 채 내뱉은 아이의 한 마디에 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아이는 냉장고에 붙은 화이트보드를 한참 동안 서서 바라봤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옷을 사 달란다. 가져온 옷이 모두 작아졌다면서 볼을 부풀린다. 그러고 보니 턱 선이 좀 둥글어진 것도 같다.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이젠 버석거리지도, 손가락뼈들이 도드라지게 잡히지도 않았다. 내 손안에서 온기를 더한 아이의 손을 더 꽉 잡아 쥐며 기대했다. 더는 슬프다는 말보다 더 슬픈 말을, 간절하다는 말보다 더 간절한 말을 찾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어제도 화이트보드의 글씨를 지웠다. 오늘도 지웠다. 부지런히 그것들을 지울 때마다 아이는 그 글씨들을 어제도 오늘도 성실하게 먹고 있다. 까만 글씨들을 먹으면 먹을수록 등을 보이던 아이가 점점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앉는다. 그리고 수줍게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맛있는 음식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젠 아이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날아와 내 가슴에 앉는다. 

    아침 비행기로 다시 떠나는 아이를 위해 새벽부터 샌드위치를 싼다. 베이글 빵을 오븐에 살짝 굽고, 빵 한 쪽에 마요네즈를 바른 후 아직 빵이 따뜻할 때 하바티 치즈를 얹는다. 그리고 다시 그 위에 토마토 썬 것, 터키 가슴살, 양상추를 차례대로 쌓아 올린 후, 빵 반쪽을 마저 올려 닫는다. 제법 뚱뚱한 속 재료들이 마음에 흡족하다. 이 모든 걸 유산지에 흩어지지 않게 꼭 눌러 싸면 된다. 혹시 몰라 두 개를 준비한다. 하나는 비행기 타기 전에, 나머지는 기숙사에 도착해 갑자기 먹을 걸 사러 가기 힘들 때 먹으라고. 

    작은 쇼핑백에 든 샌드위치를 아이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것이 이번 방학 때 엄마가 해 주는 마지막 음식이야. 그러자 아이가 갑자기 날 끌어안으며 말했다. 맛있는 음식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이의 목소리가 다시 습기를 먹고 진동을 만든다. 그 말은 슬프다는 말보다 더 슬프고, 간절하다는 말보다 더 간절한, 내가 찾던 말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내가 해 주고 싶었지만 짤막하게 토막나 공기 중으로 흩어졌던 말은 다시 목구멍으로 삼켜진다.

    아이가 떠나고, 화이트보드에 적힌 마지막 한 줄을 지운다.  


터키 샌드위치

  키 샌드위치

     샌드위치

       드위치

         위치

           치



작가의 이전글 나는 턱시도를 입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