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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dbury May 07. 2024

13.9그램

내일모레 한국으로 가는 친구 편에 작은 상자를 보낼게.

    ‘이모 박스 잘 받았어. 다음 달 3일에 네 외삼촌과 함께 춘천에 가려고.’

엄마는 사진과 함께 답장을 보내왔다. 거실 한구석 작은 탁자 위엔 이모 사진 두 장과 이모가 좋아하셨던 장미꽃 한 송이, 그리고 아주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지난 4월 7일은 엄마의 하나뿐인 언니, 우리 이모가 돌아가신 날이었다. 나에게도 엄마나 다름없는 분이셨기에 이모의 죽음은 엄마나 나에게 모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 전 영화 ‘국제시장’이 한국에서 많은 인기를 끌어 미국 내에서도 개봉되었을 때, 난 그 영화를 보며 우리 이모를 떠올렸다. 외삼촌도 월남전에 다녀오셨지만, 이모 역시 국위 선양을 하겠다고 45년여 전 고국을 떠났던 파독(派獨) 간호사셨기 때문이었다. 이모는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한국으로 돌아오시진 않으셨지만, 독일에서 결혼해 살며 꾸준히 친정 살림 이모저모를 챙기셨던 맏딸이셨다.

    지난 3월 말 난 오랜만에 이모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고, 이모가 갑작스레 암 선고를 받으셨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로부터 다시 1주일 만에 사촌오빠로부터 비보를 전해 듣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이 단 2주 만에 장맛비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실감이 가지 않아 눈물도 많이 흐르지 않았다. 엄마도 그런지 연신 믿을 수 없다고만 하셨다.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엄마를 모시고 간 독일은 날씨만큼이나 서글펐다. 이모가 안 계신 집엔 15년 전 방문했을 때 느꼈던 따스함은 온데간데없고, 허전함과 공허함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이모가 쓰시던 방, 이모가 누우셨던 침대에 가 누웠다. 마치 내가 이모가 된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침대 옆 나이트 스탠드 위에는 추억에 관한 몇 권의 소설책과 시집이 눈에 띄었다. 스르르 손으로 책장을 훑으니, 사이사이 오래된 편지지 몇 장과 사진이 떨어져 내렸다. 침대 시트 위로 사뿐히 떨어진 편지는 10년도 더 된 우리 엄마의 편지였다. 소포를 보내며, 시간이 없어 대충 적어 보낸다는 편지에는 나의 유학을 상의하는 내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 사진 속 남자는 이모가 한국에서 결혼까지 생각했었던 옛 정인이라고 엄마는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외할머니가 반대하셔서 홧김에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다나. 그 옆에는 한국 가족들의 연락처와 내 미국 연락처를 적은 작은 메모지들도 보였다. 한 번도 이모 손으로 직접 내게 전화를 하시지 않으셨기에 내 연락처가 없으신가 했더니, 메모지에는 내 연락처가 또박또박 정성 들여 쓴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이모가 마지막까지 읽으셨던 듯한 시집을 펼쳐 보니, 그 안에는 작은 여자아이의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리움.

   이모는 그리웠던 모든 것을 기억 속에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가슴 한쪽에 그 그리움이 아련하게 느껴져 왔다. 타국살이 그 그리움을 나도 잘 알기에 이모의 마지막 눈길이 같이 훑어져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그리움을 참는 것. 그것은 그저 그리움에 사무치는 밤보다 더 힘겨웠을 것이다. 이런 조용한 함부르크 외곽 도시의 밤은 제법이나 시끄러운 새들의 지저귐에 그렇게 모두 지나가 버렸다.

   엄마는 장례식을 기다리는 며칠을 이모의 짐을 정리하며 보내자고 제안하셨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냉동고의 정리였다. 오랫동안 사람 손이 안 닿았던 것 같은 창고 깊은 안쪽, 그것들은 눈으로 봐도 어느 것이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고, 어느 것이 최근에 산 것인지가 느껴질 정도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쓰레기 봉지와 바구니를 끼고 앉아 냉동고의 문을 열어보니, 퀴퀴한 냄새와 함께 온갖 것들이 꾸역꾸역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들을 모두 정리하다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겼다. 십여 년 전부터 엄마가 틈틈이 보내드린 태양초 고춧가루가 봉지째로 모두 쌓여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마른오징어와 들깻가루도 이모에게 보낸다고 최상품들로만 사 보낸 건데 먹지도 않고, 그대로 있었다. 아무리 함부르크에서 한국 식품을 구하기 힘들다 하지만, 아낄 것이 따로 있지 바로 먹어야 하는 것들을 이리도 쌓아 놓고만 사셨는지.

    반나절을 그렇게 씨름하고 나서 안방에 들어오니 여기도 만만치가 않았다. 서랍마다 틈새 없이 들어차 있는 것들을 하나둘씩 꺼내어 보다가 역시 기가 차 헛웃음이 지어졌다. 하지만 그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들려왔다. 30여 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께 드리려고 샀다가 못 드린 듯 보이는 최고급 낚싯대를 보면 낚시를 몹시도 좋아하셨던 아버지를 향한 맏딸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또한 우리 엄마를 생각하며 틈틈이 사다 나른 물건들을 보면 동생을 향한 언니의 이야기가 들려왔고, 작년에 결혼한 내 동생의 선물로 사다 놓은 듯, 곱게 개어 놓은 새털 이불을 보면 조카 부부까지도 살뜰히 챙겼던 이모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리고 서랍 속의 손녀들 이름이 적힌 보험 서류와 헬로키티 머리 장식들이 가득한 액세서리 함을 보면, 손녀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사랑하였을 할머니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거실 테이블 곁엔 가족들이랑 함께 가려고 보아 두었던 여행상품 카탈로그가, 식탁 옆에는 치매 걸린 남편의 약들이 요일별로 잘 정리되어 있었고, 타지에서 일하느라 자주 볼 수 없는 아들의 엽서와 사진들이 아주 잘 보이는 벽에 나란히 붙여져 있었다.

    얼마나 더 살겠다고 이렇게 잔뜩 쌓아놓고, 먹지도, 입지도, 쓰지도 않았을까. 기가 막혀서 원.

    엄마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가슴 속에 치미는 뜨거운 것들을 쓸어내리시는 듯했다.

    한국 전쟁 때 어린아이의 몸으로 그 무서운 시절을 참아내고, 가족들의 생계와 나라의 미래를 책임지러 독일로 건너가셨던 이모. 동양인이라고는 두 집밖에 안 되는 동네에서 어깨 펴고 자신의 삶을 견뎌내야만 했던 그 무거웠던 짐. 이모에게 그 무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나 역시 결혼과 동시에 미국에 이민 와 타지에서 살아보니 이모의 삶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족이 있는데도 외롭고, 갈 수 있음에도 그립고, 뭔가 끊임없이 채워지지 않는 그 공허함.

    내일모레 한국으로 가는 친구 편에 작은 상자를 보낼게.

    일주일 전, 사촌오빠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사실, 장례식에 갔을 때 그는 우리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고 했다. 상조회사에서 제안하길 장례는 이모가 생전에 원하셨던 수목장(樹木葬)으로 하되, 가족들이 원한다면, 화장한 일부를 작은 상자에 넣어서 모국인 한국으로 보낼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한국인이 두 명밖에 없는 작은 독일 마을에서 모국을 그리워했을 이모를 배려하는 제안이었고, 이모의 가족들 역시 그에 동의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모의 일부를 고향에 뿌려줄 수 있겠냐고 부탁한 것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여러 법적인 과정들을 마친 후 우리는 그 작은 상자를 한국에서 받을 수 있게 됐다.  이렇게 죽어서야 그 무거운 책임감의 옷들을 훌훌 벗어 버리고, 이모는 가벼운 몸으로 그렇게 그리던 고향, 춘천으로 돌아왔다. 그 작은 상자에는 돌아온 이모의 무게가 적혀 있었다. 13.9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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