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내 기념품은 사 왔어?
여행 간다고 하면 말이야 주위 사람들이 꼭 이런 말을 하곤 해. 기념품 사와! 떠나기도 전부터 어깨가 무거워지는 그 말.
그래서 내 기념품 사 왔어?
이탈리아 속에서 걷고, 숨 쉬고, 느끼는 동안 남은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봤지.
트레비 분수? 잠실 롯데월드 만남의 광장에 있는 모형을 하도 봐서인지 감흥도 없더군. ‘로마의 휴일’에서 앤 왕녀 역으로 분(分)했던 헵번의 아름다움을 평생 극찬하셨던 우리 엄마는 대사관을 몰래 빠져나온 앤만큼이나 설레고 신나셨어. 확실히 그랬지. 그 앞에서 먹었던 젤라토는 얼마나 유명한지 사람들의 필수 관광 코스처럼 줄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어. 그래, 그것도 정말 기억에 남을만한 맛이었어. 하지만 ‘로마의 휴일’이 탄생시킨 또 하나의 유명지 스페인 광장은 그저 사람과 계단이 너무 많아 무료했다랄까? 일본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남이섬도 ‘겨울연가’ 포스터에, 간판에, 동상들이 없어진다면 바로 이런 느낌일 거야. 그리고 폼페이는 역사적 사실을 만났다는 감격보다 그늘 하나 없는 뙤약볕에서 온종일 있었다는 더 끔찍한 기억만이 남았지.
아, 참. 바티칸과 베드로 성당은 가 봤니? 티브이에서 보면 교황이 나와서 손 흔들던 그곳. 웅장한 크기와 이름만 들어도 턱이 툭 떨어지는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이 도배되어 있다는 그곳. 그런데 난 하마터면 그곳에 들어가지도 못할 뻔했어. 왜냐고? 반바지를 입고 갔었거든. 그걸 미리 알려주지 않은 가이드를 매섭게 째려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주변에서 스카프를 파는 아줌마가 보였어. 성당 앞에서 왜 스카프를 파는지 궁금해하고 있을 때 나보다 앞서서 스카프를 사는 한 커플이 있었지. 그들은 스카프를 하나씩 사서 허리에 치마처럼 둘러 묶고 성당 안으로 입성하는 거야. 아하! 깊은 깨달음을 얻은 나도 잽싸게 가서 하나 샀어. 딱 보기에도 달러샵에서나 살 수 있을 것 같은 촌스러운 문양의 스카프였는데, 가격은 만 원이었는지, 이 만 원이었는지. 그래도 어쩌겠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고. 얼른 사 둘러 묶고 들어갔지. 그런데 그 스카프가 민소매를 입은 사람들은 슈퍼맨으로 만들어 주고, 반바지를 입은 남자들은 죄다 다소곳한 하와이 처자를 만들어 놨더군. 웅장하고, 조용한 성당 내부에서 들어야 할 가이드 설명은 듣지도 않고, 난 혼자 그 구경에 신나 있었어. 광장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또 어떻고. 이집트의 태양신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거라는데, 베드로 성당과 오벨리스크의 조화라니. 이 또한 얼마나 역설적인 장면이냐고.
그런데 너 그거 알아? 사람들은 무언가를, 어딘가를, 누군가를 항상 기념하려고 하는 것 같아. 기념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오래도록 기억하려고 하는 거잖아. 우리 교회에서도 지난주에 기념 수건을 나누어 주었어. 15주년 행사가 있었거든. 앞으로 그 수건에 손을 닦을 때마다 거기에 쓰여 있는 문구를 읽으며 아, 이 수건은 우리 교회 15주년 행사 때 나눠 준 것이었지, 하며 그날을 기억하겠지? 바티칸 박물관 건물 외벽에 새겨진 누군가의 이름들은 그들에겐 그 순간을 기념하고픈 반칙 같은 낙서이기도 하지. 여행 내내 투덕거리던 엄마와 내가 트레비 분수 앞에서 다정히 찍은 사진도 이때 우리 참 행복했지, 라고 억지라도 부리고 싶은 기억의 몸부림일지도 몰라.
기억과 추억의 가치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달라지기도 해. 참 신기한 일이지. 베드로 성당 안에 들어가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앞으로 밀려 이동하고 있었을 때, 사도들의 동상이 벽면으로 서 있는 것이 보였어.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사도들 동상의 발을 만지고 지나가더라고. 가이드 설명을 들어보니, 사도마다 의미가 좀 다르긴 한데, 그중 베드로 동상의 발을 만지면 행운이 온대. 우습지? 갑자기 제주도의 돌하르방이 떠오르더라고. 돌하르방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고 해서 제주도에는 코가 닳아 없어져 버린 돌하르방이 참 많거든. 베드로 동상의 발도 무늬가 사라질 정도로 반들반들해져 있었어. 하지만 난 그런 건 믿지 않아. 그런데도 나 역시 쓱 만져본 것은 혹시나 하는 호기심이었을까, 아니면 나만 안 만지고 가면 손해지, 하는 억척스러운 욕심에서였을까.
그래도 다 의미 없더라. 우리 할머니 돌아가실 때 보니, 그 벽장 깊숙한 곳, 켜켜이 쌓아 두셨던 앨범들. 할머니께는 기념하고픈 모든 순간이었을 텐데, 누구 하나 챙기려 하는 사람도 없고, 가치와 의미를 두려는 사람도 없고. 다 버려지더라. 내 인생이라는 긴 여행의 끝에선 기념할 것이 뭐 하나라도 남을 수 있을까? 그런데도 계속해서 내 인생의 기념품들을 만들어 내는 내 모습에 작은 의미라도 부여하고 싶어졌어. 그런데 그것이 베드로 성당의 사도 동상은 아니었으면 해. 세계에서 추앙받는 최고의 사도가 발을 만지면 행운이나 가져다주는 신세는 되지 말았어야지. 베드로 성당과 오벨리스크 같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런 것도 아니었으면 해. 오히려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베드로 성당 앞에서 산 촌스러운 스카프가 더 나을지도. 그런데 너 내 말 듣고 있니?
어? 그, 그럼 다 듣고 있지. 그런데, 그래서! 내 기념품은 사 왔어?
잠시만 기다려 봐봐. 음. 이것도 아니고, 요것도 아니고. 그래, 여기 있다. 옜다! 기념품.
응? 이건 스카프잖아? 이탈리아 명품 스카프야?
베드로 성당 스카프.
뭐? 성당에서 스카프도 팔아? 비싼 거야?
그럼. 비싼 거지.
‘그 스카프의 원래 가치보다는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