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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dbury Nov 18. 2024

난해시 씹어먹기

엄마, 이 시는 목적에 대한 시 같아.

   머리가 난해시 하나를 먹은 것처럼 복잡하다. 밀린 글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자꾸만 등 뒤에서 기웃거린다. 마감이 코 앞이다. 온종일 자판을 두드려도 될까 말까 한데 딸아이 학교에 와 있다. 펀드레이징을 겸한 달리기 행사란다. 굳이 참석 안 해도 되는 걸 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와 앉아 있다. 초조함에 안 되겠다 싶어 랩톱을 켠다. 하지만 빈 워드 창을 열어 놓고 손가락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달리라고, 어서 달리라고, 시간이 없다니까. 손가락을 채근한다. 그때, 갑자기 와!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이들이 달린다. 십여 명의 아이들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하얀 선을 따라 달리고 있다. 아이들의 달리기. 그런데 기억 어딘가에서 어렴풋이 이런 장면을 본 것 같다.  


    첫 번째 아이가 뛴다. 

    두 번째 아이도 뛴다. 

    세 번째 아해가 뛴다. 

    네 번째 아해도 뛴다.

    다섯 번째 아해가 질주한다.

    여섯 번째 아해도 질주한다.

    일곱 번째 아해가 무섭다고 한다.

    여덟 번째 아해도 무섭다고 한다.

    제9의 아해가 무섭다고 한다.

    제10의 아해도 무섭다고 한다.

    제1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러오.

    제12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러오.



  난 어느새 이상의 <오감도> 제1호 시 안에 들어와 있다. 그곳에서도 아이들이 달리고 있다. 좁은 골목, 이름도 알 수 없는 열세 명의 아이들. 턱까지 차오른 숨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들리는 듯하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상은 이 시를 그저 나처럼 눈에 보이는 대로 쓴 건 아닐까? 

   아이들이 골목을 달리고, 달리는 아이들은 저마다 달리기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다. 달리기의 속성이 그렇다. 출발 신호를 기다릴 때면 심장은 터져나갈 것만 같고,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은 공포가 밀려온다. 그리고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생각들. 꼴찌로 들어가면 어떡하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쳐다보고 있는데 창피해서 어떡하지? 넘어지면 어떡하지? 순발력이 없어 출발이 늦어지면 어떡하지? 신발이 벗겨지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만으로도 이미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결국 그 안에는 달리는 걸 즐기는 무서운 1, 2, 3등이 있고, 잘 못 달려서 무서워하는 나머지 아이들이 있다. 그게 막힌 골목에서 하는 달리기든, 뚫린 운동장에서 하는 달리기든 상관없이 아이들의 달리기는 항상 그런 식이다. 


이 시에 대해 저마다의 복잡한 해석을 내놓은 사람들의 글을 읽었다. 워낙 난해해서 정확한 해석이 아직 없고, 그래서 수능 문제로도 출제될 수 없는 시. 그런데 그 의미는 애초부터 없었던 건 아닐까. 이상에 대한 우리의 높은 관심과 기대가 그의 시를 과대평가하진 않았을지. 흰 종이에 점 하나만 찍어도 여백의 미가 어쩌고저쩌고하는 평론가를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처럼. 반대로 유명한 예술가는 ‘거 봐, 사람들이 예술에 대해 뭘 알겠어. 유명해지기만 하면 똥을 싸도 손뼉을 친다니까.’ 하며 관객들을 비웃을지 모른다. 어쨌든 그들 가운데 나 같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단순한 또라이가 하나쯤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제야 내 손이 자판 위에서 달릴 목적을 찾은 것 같았다. 뚫린 생각 위에 이번엔 반드시 1등을 놓치지 않을 거라는 듯, 속도에 박차를 가한다. 하지만 이젠 2등이어도 좋다. 아니, 내 손이 질주하지 않아도 좋다. 사람들에게 내 글이 인정받지 않아도 좋고, 내가 쓰고 싶은 건 1안이어도, 2안이어도 상관없이 좋다. 때론 글을 쓰지 않아도 좋다. 비로소 난 그 강박감이 주는 공포에서 벗어나려 한다. 인제야 글이 내게 주는 자유다.


   딸아이가 결승선으로 들어온다. 한 네 번째쯤 되었던 그 아이. 달리기의 두려움을 이겨낸 그 아이에게 일어나 손뼉을 쳐 주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상의 <오감도>를 직접 들려줘 봤다. 그저 아이의 견해가 궁금했다. 사실, 그냥 ‘이게 뭐야?’ 정도를 기대했던 것도 같다. 아니면 나처럼 ‘처음부터 의미 없는 시가 아닐까?’라고 해도 충분히 만족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소에도 늘 평범한 예측을 거부하는 딸아이의 대답은 오늘도 날 놀라게 했다. 


    "엄마, 이 시는 목적에 대한 시 같아. 목적 없이 달리는 사람은 언제나 두렵잖아. 하지만 목적을 갖고 달리는 사람은 전혀 두렵지 않지. 그게 어떠한 상황(뚫린 길이나 막힌 길이나)에서도 같을 거고. 또 때로는 사람이 굳이 목적을 갖고 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그리고 어쩌면 저 시는 처음부터 의미가 없었을 수도 있고. 한마디 더 하자면, 보통 저런 시를 쓰는 시인들은 대체로 우울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어 하거나. 하지만 시는 참 흥미롭네. 재미있어."


    순간, 난 그 아이가 무서운 아해, 나는 무서워하는 아해가 아닐까 생각했다.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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