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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시 감별사 Oct 29. 2022

꽃 대궐 하동에서의 결심

2-1 하동 살아보고 싶은 또 다른 소도시 

경주 이후 본격적으로 지방을 다니기 시작했다. 경주 여행 가이드는 무산되었지만 다른 출판사와 전국을 대상으로 한 대중교통으로 국내를 여행하는 가이드북을 내기로 했다. 맡았던 지역이 경주가 있던 경상북도와 함께 전라남도였다. 


2014년 여름 책이 나오기 전까지 여기 저기를 다녔는데 가장 완벽했던 여정을 꼽으라면 2014년 3월 중순 매화 필 무렵에 떠났던 순천-하동-구례 2박3일을 주저 않고 들 수 있다. 풍경은 물론 날씨, 조건, 음식 심지어 차 시간까지 완벽했다. 숙박 빼고는 나무랄 데가 없는 여행이었다(요즘은 가성비 대비 좋은 숙소가 많이 생겼다). 그것도 대중교통만 이용해서 움직였는데 그래서 지나고 나니 더욱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되었다. 당시 함께 여행했던 대학후배와는 이후에도 여러 번 다른 지역도 함께 여행을 했는데 그녀도 이때의 여행을 베스트로 꼽는다. 


여행 첫 날 순천에서는 기가 막힌 타이밍에 순천만의 일몰까지 감상하는 행운을 누렸다. 둘째 날에는 새벽부터 기차를 타고 하동으로 넘어가 광양의 매화마을로 갔다. 매화는 만개해있었고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져 같이 간 후배와 매화나무 아래서 모닝 막걸리도 마셨다. 운전을 하지 않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하동읍내로 와 소설 [토지]의 고장 악양행 버스를 탔다. 순천과 광양에서는 전라도 사투리가 즐겁게 하더니 악양행 버스는 경상도 사투리가 여기저기서 넘실거렸다. 할머니, 아주머니들은 버스타고 여행하는 우리가 신기하셨던 지 악양 최참판댁에 간다고 하자 버스에서 못내릴까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챙겨주신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풍경인가 단 몇 분 만에 전라도와 경상도를 오가며 변화무쌍한 사투리만큼의 다이나믹함과 시골의 정취를 듬뿍 느끼고 있으니. 명작의 정취가 담겨 있는 하동 최참판댁과 주변을 둘러보는 일도 흥미로웠다. 최참판댁 누마루에 앉아보니 소설에서 최참판댁 땅이었다는 악양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땅이 참 잘 생기기도 했고 주변 풍경과 무척 잘 조화를 이뤄 내 땅도 아니지만 왠지 배가 불러졌다. 매화와 개나리 등 봄꽃이 잔뜩 핀 악양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오후엔 쌍계사와 화개장터로 갔다. 악양 최참판댁 앞에서 탄 버스는 쌍계사까지 간다. 쌍계사 올라가는 십리벚꽃길은 아직 벚꽃이 필 시기는 아니었으나 멀리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계곡과 차밭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신나게 돌아다니고 화개장터에서 늦은 오후 다시 막걸리 한 잔을 한 후 버스를 타고 구례로 넘어갔다. 구례읍 주민들이 좋아한다는 식당에서 먹은 가자미찜도 너무 맛있었다. 다시 술 한잔이 빠질 수가 있나.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술을 마셨는데 경치 좋고 공기도 좋은 데 기분까지 좋아서 마신 술이라 그런지 취하지도 않는다. 구례읍과 가까운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음날은 일찍 산동면으로 산수유를 보러갔다. 온 마을이 노란 산동면 또한 너무 예쁜 마을이었다. 날씨마저 3일째 완벽했다. 


휴일이었던 그날 오후에 산동면으로 사람들이 밀려들어온다. 얼른 구례읍내로 나왔다. 또 다른 후배가 알려준 맛집 몇 곳을 어슬렁거리다 저녁이 가까워오자 기차를 타고 귀경했다. 이 때의 함께 갔던 순천과 구례 모두 좋은 도시지만 3개 도시 중 유독 하동이 기억에 남는 것은 처음 방문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구례에서 하동과 광양을 끼고 흐르는 섬진강이 너무 아름다웠다. 당시 '대중교통'을 이용해 여행하는 책을 쓰는 일이 손에 안잡혔는데 3일간의 순천-하동-구례 취재 여행으로 책을 써야 하는 이유를 확신했다. 


이후 하동을 두 어번 더 갔다. 2016년 이른 가을에 찾아갔더니 벼가 누렇게 익은 악양 들판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작년 가을 행사 때문에 다시 간 하동에서는 평소 가보지 못했던 지리산권 삼성궁과 하동호수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긴 또 다른 별천지였다. 삼성궁은 게임이나 영화에서 볼 수 있을 법한 한국형 판타지 세계가 펼쳐지는 듯했다. 


올해 봄 하동을 다시 찾았다.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1년 중 1-2주만 볼 수 있다는 십리벚꽃길의 벚꽃이 만개해있는 기간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지만 직접 보니 정말 장관이었다. 계곡을 사이에 둔 길 양쪽으로 벚꽃 구름이 뭉개 뭉개 피어올랐다. 이곳의 벚꽃이 더욱 아름다운 이유는 수령 40-50년된 큰 벚나무가 분포해있고 지리산에서 이어지는 계곡이 아름다우며 무엇보다 차밭이 있기 때문이다. 


하동은 보성, 제주와 함께 한국의 3대 차 생산지이다. 화개면의 차밭은 계곡의 산자락을 이용해 계단식으로 차밭을 형성해 차를 재배하고 있으며 단일 지역에 집중 관리함으로써 유기농 재배도 가능하게 하여 전 세계적으로 주목하는 차 생산지로 꼽힌다. 차밭과 어우러진 벚꽃의 풍경은 벚꽃이 많은 다른 지역과는 또 다른 풍경을 만든다.  


3월말의 하동은 십리벚꽃길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가 꽃대궐이었다. 근래 일부러 조성된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부터 벚나무들이 하동 곳곳에 조성되어왔다고 한다. 수령 40-50년은 기본인 울창한 벚나무 숲들이 하동 곳곳에 포진해있다. 꽃 좋아하면 나이 들었다는 증거라는데 예쁜데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예쁜 건 예쁜 거다. 다만 젊었을 때는 꽃을 쳐다볼 여유가 없었을 뿐. 꽃이 예쁜 건 꽃이 피는 순간이 짧기 때문이 아닐까. 


이때 하루 정도 머문 하동에서 꽃도 꽃이지만 나를 사로잡은 것은 섬진강이었다. 모래사장이 곱게 살아있는 섬진강 하구의 풍경은 지난 몇 년 사이 잃어버린 강의 고유풍경과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경주를 다니던 초창기 낙동강 하구 유역을 잠깐 돌아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펼쳐지던 옛 그림과 같은 풍경을 잊을 수가 없다. 강 정비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며 깍고 없애버린 덕분에 이제는 보기 드문 풍경이 되어버렸지만. 


해지는 강을 배경으로 산책을 하고 캠핑을 하는 풍경이 너무 소중해 보인다. 코로나 시국에도 독특한 지역 관광 콘텐츠로 이름을 알린 하동의 주민관광협동조합 놀루와(2021 한국관광공사 ‘한국관광의 별’ 선정)는 섬진강의 모래사장에서 한 달에 한 번 보름달이 뜨는 날 섬진강변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는 ‘섬진강 달마중’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하동에서 좀 더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강렬해졌다. 더불어 당시 이 글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손에 안잡히던 글의 방향성이 조금은 보이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쓰는 작업에 성심을 다해야 할지 갈팡질팡 마음을 못 잡았는데 하동에서 결심했다. 지방 소도시를 다녔던 경험을 글로 남기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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