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가장 핫한 거리에 관하여
1-8 경주 황리단길의 탄생과 성장
경주 황리단길은 최근 가장 핫한 지방 명소이다.
인구 20만 명이 조금 넘는 경주에서 황리단길만은 코로나 기간에도 코로나 이전 동기간 대비 50% 이상의 방문객 증가를 보여왔다. 경주를 10년 이상 꾸준히 다녔던 나도 주중에도 사람들이 붐비는 황리단길을 보면 놀랍기만 하다. 단일 마을 단위로서 서울, 부산의 일부지역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사람이 붐비는 곳이 아닐까 싶다.
경주 황리단길은 경주 시내 고속버스터미널 부근 내남사거리에서 시작해 (구)황남초등학교 사거리까지의 도로를 기준으로 양쪽의 황남동, 사정동 일대 지역(약 20.3㎢)을 말한다. 황남동 한 켠은 대릉원이 있고 대릉원 정문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첨성대와 월성이 있는 경주동부역사문화지구가 펼쳐진다. 황리단길에서 대릉원까지는 도보 5분 거리이며, 첨성대, 월성, 국립경주박물관 등은 도보 10-15분 거리다. 신경주역에서 15분이면 시내버스로 들어올 수 있고 경주 IC에서도 5분이면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입지적으로도 좋은 동네다.
대릉원 기준으로 보면 이 지역은 대릉원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일대는 ‘황남 큰길’이라 불리던 곳으로 1960-70년대 낡은 건물과 조선말기, 일제강점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시대적 특징이 담긴 다양한 한옥들이 밀집된 한옥 특화지역이기도 하다.
입지조건이 좋고 자연스럽게 형성된 한옥지역임에도 처음 경주를 방문했던 2011-12년 무렵에는 경주사람들조차 기피하는 지역이었다. 이곳에 거주하려면 오래된 집들은 거의 대부분 수리가 필요했다. 집 자체가 낡은 것은 둘째 치고 난방 공사가 필수적이었는데 이곳은 도시가스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대릉원 이웃 마을로 땅만 팠다 하면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니 함부러 땅을 파기 시작했다가는 유물 발굴이 모두 끝나고서야 본 공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가스 조차 들어올 수 없는 지역이기에 프로판 가스 또는 기름 보일러로 이용해 난방을 하고 있었는데 왠만한 규모의 집은 겨울철 난방비만 70-80만원에 이른다고 했다. 게다가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집 부근에 주차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난방이야 기술의 발달로 어느 정도 해결된다고 해도 주차는 당장 해결하기 요원해보이기에 경주에서도 오히려 집값이 저렴한 곳으로 꼽혔다.
나도 6개월 살 집을 구하다가 월세방을 소개해준 부동산에 문의해서 한 두 집 정도로 둘러보러 간 적이 있었다. 좁은 골목길 안쪽의 집은 건평만 100평 정도에 이를 정도로 컸는데 당시 초봄이었는데도 집은 냉골이었고 연세있으신 집 주인께서 전기장판을 깔고 넓은 집 한 켠에 옹기종기 앉아계셨던 것이 기억에 난다.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노령 인구마저 줄어든 마을이었고 해질 녁이면 길거리에 인적조차 끊어져 무섭기 까지 했다.
다만 여행자들에게는 이처럼 고즈넉한 분위기의 한옥마을이 없다. 1970-80년대를 연상시키는 동네의 레트로한 분위기, 작은 골목이 미로처럼 이어지며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추상미를 쫓아 무작정 경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던 남자주인공(김상경 분)이 배회하던 추상미가 사는 동네를 닮았다.
아는 사람들만 아는 동네였던 당시에도 음식점과 게스트하우스 몇 곳만이 영업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옛 집의 풍류가 살아있던 식당은 한옥의 분위기를 살려 경상도식 정식 상차림으로 인기를 얻었고 외국인들이 더 사랑하는 게스트하우스는 경주 1호 게스트하우스로 칭송받는 곳이었다. 세월이 느껴지는 세탁소, 수퍼, 철물점 등이 남은 동네 상권을 이어갔다. 카메라 들고 대릉원 서쪽 돌담길과 골목을 산책하면 왠지 나만 아는 보물을 발견하고 간직하는 기분이었다.
이곳은 70-80년대만 해도 점집이 많았던 곳이라고 한다. 군데 군데 대나무 깃대가 많은 것은 점집이 많았던 것을 의미한다. 대릉원 이웃동네로서 이곳 또한 왕이나 귀족들의 무덤이 있었을 거란 추측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또한 외부에서 손님들이 경주에 왔을 때 머물던 여관 등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황리단길에 젊은 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2014-2015년부터 이다. 집을 새로 지을 수 없으니 대부분 구옥을 리모델링했다. 마치 누가누가 리모델링을 잘하나 내기라도 하듯 독특한 공간 활용이 눈길을 끌었다. 대도시와 외국에서의 경험을 더한 현대적 감각을 공간에 입혀 카페, 펍, 식당, 기념품숍, 게스트하우스, 사진관 등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2015년 (구)황남초등학교 부근에는 객실 50여개가 넘는 한옥 호텔이 들어서면서 지역은 완전히 재생의 불이 붙었다. 서울 이태원의 경리단길과 비교해 황리단길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이것이 동네를 부르는 정식명칭으로 굳어졌다. 도로변은 물론 주민들의 주거지인 골목 안쪽으로 상권이 확장되면서 이제는 사계절, 주야간 상관없이 여행자들이 몰린다. 2012년 처음 이 동네의 집을 구경갔을 때 가격도 가격이지만 이후 리모델링이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재생의 광풍으로 인해 가격은 수도권 왠만한 집값을 넘어설 정도로 부담스러워졌다.
어느 정도냐면 2016년 경상북도문화관광공사에서 외뢰하여 만든 ‘버스타고 경주여행’이라는 리플릿에 황리단길 일러스트 지도를 그려 넣었는데 취재할 때와 리플릿을 인쇄하려면 생기는 간극인 2-3달 사이에 새로운 업소가 생기는 것은 물론 기존 업소가 사라지고 다른 업소로 교체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2019년까지 겨우 1년에 1-2차례 업데이트를 이어갔는데 코로나시국을 지나는 2년동안 기존 일러스트 지도는 폐기해야할 상황이 되었다. 한 자리에서 계속 영업을 이어가는 곳이 드물 정도다. 중심부의 부동산 가격이 너무 올라서 기존에 황리단길의 터주대감으로 통하는 업소들은 오히려 황리단길을 벗어나 주변 지역에 매장을 다시 열고 있다.
이곳은 처음에는 관의 입김이 전혀 없이 민간의 힘으로만 재생되기 시작한 동네다. 몇몇 민간 사업체의 성공이 더욱 재생을 부채질했다. 고질적인 주차와 인도가 없는 2차선 도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이 뛰어들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기존 시민들을 설득해 황리단길 중심도로를 일방통행으로 바꾸고 걷기 좋게 인도를 넓힌 것은 동네 가치를 한 단계 높인 조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곳을 바라보는 지역 주민들의 시선은 양비론적이다. 코로나 시국에도 끊임없이 방문객을 찾아오게 할 만큼 도시 분위기를 바꾸고 경주의 상업적 가치를 높이긴 했지만 도시 재생사업이 그렇듯 빛이 있으면 어두운 면도 함께 존재한다. 기존 도심의 상권은 완전 죽어버렸고 황리단길로 얻은 가치가 과연 경주시민들에게 온전히 돌아갔는지도 의문이었다. 재생 초창기엔 분명 노쇠한 동네가 살아나면서 지역주민들에게도 이익이 돌아갔지만 외부 자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기존 경주 시민들은 오히려 이제는 황리단길에서 소외되고 있는 듯하다.
경주에서 오래 살아온 파트너는 황리단길로 인해 거주하는 젊은 층이 많이 늘어난 것만으로도 긍정적이라고 말한다. 노인 인구만 남아있는 동네가 아니라 비즈니스를 위해 주민등록 거주지를 옮기는 젊은 층의 유입은 장기적으로 경주시민 사회에도 분명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거기에 황리단길같은 변화를 바라는 지역 동네들이 조금씩 활기를 띄고 있다. 불국사 아래 옛 수학여행 숙소들이 모여있던 곳이 불리단길로 불리며 상권이 일어나고 있으며 구도심의 중심지였던 경주 읍성부근, 경주고등학교 주변 구황동도 활기를 띄고 있다.
여행자들에게는 어떨까? 경주를 오래 알아온 나로서는 황리단길을 바라보면 양가감정이 앞선다. 산책하기 좋은 고즈넉한 동네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초창기 개성있는 업소들이 떠나고 그 자리를 자본이 채우게 된 점은 무척 아쉽다.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의류. 화장품, 잡화점 들이 하나둘 늘고 있다. 아직 거대 프랜차이즈 커피숍이나 브랜드업체가 황리단길 안에 들어선 것은 아니지만 스타벅스를 비롯해 외곽으로 하나둘 늘어나고 있으니 경주다운 분위기를 그나마 지켜왔던 동네가 아주 사라질까 걱정부터 앞선다.
사실 주민들은 물론 나처럼 오랜 기간 경주를 드나든 준 시민들은 황리단길을 잘 가지 않는다. 음식점이나 카페는 개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고 사람들이 너무 많아 복잡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주차가 어려워서, 나같은 여행자들은 정신이 없어서 잘 가지 않게 된다. 주차 문제는 늘 황리단길의 고질적인 문제로 꼽힌다. 일방통행으로 바꿔서 그나마 흐름이 좀 나아졌을 뿐이지 여전히 자동차는 걷는 사람을 위협한다. 공휴일은 물론 평일에도 주차를 위해선 한참을 서 있어야 할 수도 있다.
차를 동네 밖에 세워두고 이곳에선 좀 걸으면 안될까? 내남사거리에서 황리단길에 끝나는 (구)황남초등학교 사거리까지 메인 도로의 길이는 1km가 채 되지 않는다. 슬슬 걸어도 10여분이면 내려온다. 주차 문제에 관해선 대중교통에 익숙한 도시인들보다 가족 수대로 자차를 운영하는 지역주민들이 더 양보가 없어 보인다. 본인이 가려는 목적지 부근에 주차를 하지 않으면 큰 일이라도 나는 줄 안다. 일 때문에 만난 지방 공무원 한 분은 뚜벅이로 다니는 내게 자차 없이 어떻게 여행이 가능하냐고 되물은 적이 있다. 황리단길 메인 도로가 일방통행이 되기까지에도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고 들었다.
황리단길의 변화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갑자기 주목받았던, 개성 없는 동네로 남을지 경주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지속적인 핫플레이스로 남을 지 향후 2-3년이 가장 중요할 듯하다. 또한 대한민국의 대표 관광도시로서 경주의 미래 또한 황리단길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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