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썬더 볼츠>, 관성적 폭력과 싸우는 새로운 영웅의 등장
마블은 <어벤저스: 엔드 게임> 이후로 새로운 히어로물을 그리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마블의 가치관이 재미를 망쳤다는 관객들의 야유에도 마블이 이번에 기어이 내놓은 어벤저스는 여성 두명을 포함하고 그 중 한명은 흑인이다. 게다가 이번엔 자신감은 커녕 패배감을 덕지덕지 묻히고, 실패 덩어리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지금껏 있었던 그 어떤 히어로보다 나약한 모습으로.
미국의 히어로물이 수없이 답습하는 장면이 있다. 뉴욕의 높은 건물들이 무너져 내리고 사람들은 혼돈과 공포에 휩싸인다. 누군가 이 속에서 좀 구해달라는 마음이 간절할 때 히어로는 등장한다.새로 돌아온 어벤저스 '썬더볼츠' 역시 이 장면의 재현이다. 오늘에야 그 장면이 지독하게 반복되는 이유가 뭔지 알게 되었다. 미국 사람들이 염원하는 건 911테러에 처했던 그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다. 썬더볼츠는 내게 세월호를 떠올리게 했고 이제야 우리에게 히어로물이 필요한 이유를 알았다.
세월호가 바다에 가라앉았을 때 나는 열아홉 살이었다. 말도 안되는 소원을 빌거나 기도를 하지 않는 나이었는데, 사고가 난 후에는 수없이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리고 말도 안되는 능력으로 내가 혹은 누군가가 거기 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상상을 했다. 지금도 가끔 그런 상상을 한다. 그날 거기 있던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구출되는 상상. 내가 시간을 되돌려 그날로 가 어떻게든 출항을 막는 상상. 그리고 그 상상은 조금씩 그들을 구하지 못한 나에 대한 죄책감으로 쌓였다.
어디 짊어지고 사는 죄책감이 그뿐인가. 자신이 행한 악행은 물론이고, 타인이 나에게 저지른 악행 조차도 우리는 자신을 탓한다. 왜 그때 더 잘 대처하지 못했나, 왜 그때 그렇게 나약했나, 하는 생각들은 우리에게 남아 피해자인 나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이 된다. 사람은 누구도 불운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우연히 안 좋은 일은 내게 찾아오고 그 모든 걸 피해도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은 결코 피할 수 없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나와 맞닿은 사람도 늘어나고 우리가 겪어야 하는 상실도 늘어난다. 그런 우리에게 히어로물은 내가 구하지 못했던 '그들'을 구해내는 꿈을 이루어주는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끔찍한 폭력 앞에 히어로는 없었다. 우리가 어린 시절 겪어야 했던 어른들의 폭력, 잔인한 경쟁, 미숙한 실수, 그 속에서 어설프게 행동한 나에 대한 혐오는 매일 우리를 괴롭힌다. 거대한 악당을 두들겨 패 해치운들 그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부모 세대가 '낭만'이라고 불렀던 오래된 관습에 '차별', '부당', '폭력'이라는 반기를 든 세대이지만 그럼에도 이미 내게 물든 폭력이 나를 휘두르곤 한다. 어쩌면 나보다도 어린 세대에게 기존의 히어로는 유치하고 우스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는 건 웬 커다란 악당이 아니다. 지금 어린 세대가 싸우고 있는 건 기성 세대가 아무런 비판없이 확장시킨 폭력의 세계이다. 그들은 일상화된 혐오, 환경 파괴, 차별, 동물 학살 같이 일상에 스며들어버린 것들 그래서 이미 나 자신에게도 묻어있는 것들에 저항하고 있다.
그래서 썬더볼츠는 강하지 않다. 강한 사람이 세상을 망치는 모습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았고 강한 사람이 언제나 히어로는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실과 실패, 나약함 앞에 좌절한 인간의 모습은 이제껏 사이다 같은 쾌감을 주던 기존의 히어물과는 조금 다르다. 썬더볼츠는 우리 각자의 자기 혐오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구하지 못한 타인과 자신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용서하게 한다. 이게 혐오의 시대를 건너는 마블이 하고 있는 자기 혐오와의 싸움이다.
이런 시대의 히어물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엣원스>의 에블린이 그랬던 것처럼 싸움이 무의미한 세계로 나아가려 한다. 누군가를 지게 만들어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죽게 만들어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서툴고 미숙한 존재를 더는 밀어내지 않기 위해 나에게 물든 관성과 싸우려 한다. 이렇게 썬더볼츠가 악당을 해치우는 대신 서로를 붙드는 데 집중한다. 폭력을 물려받기를 거부한 새로운 세대의 영웅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