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의 여백

「곰브리치 세계사」를 읽고

by 조조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곰브리치 세계사』는 오랫동안 “세계사를 처음 만나는 가장 좋은 책”으로 평가받아 왔다. 실제로 이 책은 방대한 시간을 재밌게 엮어냈다. 왕과 황제, 전쟁과 정복, 제국의 흥망이 큰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러나 다시 읽은 『곰브리치 세계사』는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이 책이 전형적인 서구 중심의 거시 세계사이며, 전쟁을 중심축으로 서술된 역사라는 점이 또렷했다. 세계사의 흐름은 대부분 ‘누가 누구를 정복했는가’라는 질문으로 정리되고, 변화는 늘 무력 충돌을 통해 설명된다. 인간이 전쟁을 통해 얼마나 많은 질서를 바꾸어 왔는지를 간단하게 보여주지만, 책에 서술되지 않은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면 무겁게 읽혔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지도자’들의 행보 뒤편에 존재했을 수많은 삶들을 계속해서 상상했다.

한 도시가 정복당할 때, 한 제국이 확장될 때, 그 순간 평범하게 살던 사람들의 일상은 통째로 사라진다. 이름도 목소리도 남기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 삶이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과연 이런 역사만이 ‘중요한 이야기’인가. 이 책의 역사 속에는 평범한 사람도, 여성도, 장애인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이 살아온 시간과 선택, 상실과 저항은 늘 주변으로 밀려난다.

역사란 이미 완성된 기록이 아니라,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복구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다시 묻는 작업이다. 지워진 삶들을 다시 불러내고, 말해지지 않은 경험을 연결하는 일, 그 과정 자체가 우리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만들어가야 할 역사일 것이다. 『곰브리치 세계사』는 여전히 뛰어난 입문서이지만, 동시에 분명한 한계를 가진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는 오늘의 독자는 그 서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이 책에 적히지 않은 침묵된 것들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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