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호구가 아닙니다

그저 선한 마음이 길을 잃었을 뿐입니다.

by 마음멘토 이송


​"선생님, 제가 호구라서 이런 일을 당하는 걸까요?"
​상담실 의자에 깊게 파묻혀 고개를 떨군 남성 내담자의 목소리는 힘없이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내뱉은 '호구'라는 단어는 스스로를 향한 날카로운 비수이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 상황에 대한 처절한 비명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오픈채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만난 지 단 3일 만에 시작된 동거. 누군가는 무모하다고 하겠지만, 외로움이 짙은 시대에 섬광처럼 찾아온 온기는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을 겁니다. 하지만 불꽃이 사그라든 자리에는 온기가 아닌 '착취'가 남았습니다.
​여자는 일을 그만두었고, 크고 작은 명목으로 돈을 요구했습니다. 사소한 이유로 이별을 통보하고도 다시 매달리는 그를 이용해 경제적 갈취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더욱 잔인했던 건, 이별 바로 다음 날 다른 연애를 시작하면서도 내담자의 죄책감과 미안함을 교묘히 건드려 자신의 욕망을 채웠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 관계가 잘못되었음을 머리로는 알았습니다. 하지만 분노와 미안함, 애틋함이라는 모순된 감정의 타래 속에 갇혀 제 발로 상담실 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검사가 말해주는 수치 너머의 진실
​상담을 위해 진행한 객관적 지표들은 그의 상태가 얼마나 한계치에 다다랐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간이정신건강검사(SCL-90-R): 우울 점수 70T, 중독 점수 65T 이상의 고위험군.
​교류분석(TA) 및 삶의 태도: 타인의 눈치를 보는 '적응적 자아'가 비대해져 있었고, 관계의 경계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무너져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조절할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된, 심리적 '방전' 상태였습니다.
​엔라이팅 카드가 보여준 무의식:

과도한 책임감이라는 짐


​마음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엔라이팅 카드' 상담에서는 더욱 가슴 아픈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카드 한 장 한 장에는 그가 짊어진 '과도한 책임감'과 '자기 비난'이 선명하게 투영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상대의 삶이 망가진 것조차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조금 더 잘했다면, 내가 그때 참았다면...이라는 자책은 가해자가 휘두른 가스라이팅의 칼날보다 더 깊게 그를 베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선함은 죄가 없습니다
​저는 그에게 정식 계약이나 복잡한 치료 절차를 먼저 제안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논리적 이성'을 되찾고, 무너진 '자기 결정권'을 존중받는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끊어내는 것은 단순히 연락처를 지우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마음의 영토에 무단 침입한 타인을 밀어내고, 건강한 울타리를 다시 세우는 교육의 과정입니다. 저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바보 같은 호구가 아닙니다.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일 뿐입니다. 그 선함을 이용한 상대방이 나쁜 것이지, 당신의 책임감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정서적 갈취는 한 사람의 영혼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만약 당신도 지금 비슷한 무게의 짐을 지고 있다면, 더 이상 자신을 탓하지 마세요. 당신의 선함이 다시 당신 자신을 돌보는 에너지로 쓰일 수 있도록 응원하겠습니다.
​글 | 이송 (해맑음심리상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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