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당신이 쌓아온 이야기이다.

조던 피터슨 - <12가지 인생의 법칙> 큐레이션

자신을 제대로 보살피려면 먼저 자신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
스스로 타락한 피조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실하게 살고 진실을 말한다면, 우리는 다시 선으로 돌아갈 수 있고 우리 자신과 타인과 세상을 존중할 수 있게 된다.
그래야 세상을 똑바로 세우려는 노력을 시작할 수 있고, 지옥 같은 세상을 천국으로 이끌 수 있다.

<12가지 인생의 법칙 - 조던 피터슨>


우리는 자신을 제대로 존중하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추악하고 무가치하고 비열한 모습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 뿐이죠. 우리는 모두 어두운 면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런 존재가 만약 진정한 자신에 더 가깝다면, 우리는 왜 스스로를 그토록 애지중지 보살펴야 하는 걸까요? 왜 스스로를 도와 줘야 할 사람처럼 대해야 하는 걸까요?


자신이 얼마나 추악하고 저질스럽고 한심하고 부끄러운 존재인지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밝은 곳으로 나와 진실하게 살고 진실하게 말하기를 어려워하죠.


그러나 우리가 진실해지고,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 스스로를 대한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세상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을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에게 내리던 원망과 증오로 가득한 형벌을 멈추고 자신을 믿고 행동할 때 비로소 세상이 망가지는 것을 멈출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제대로 보살피고,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고, 기꺼이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나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높은 목표를 지향하라.
주의를 집중하라.
고칠 수 있는 것이면 고쳐라.
나의 부족함을 정확하게 인지하라.
세상의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나서기 전에 나의 잔혹한 심성을 살펴라.

편의주의는 자신의 어두운 비밀을 감추고,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고 쉬운 길만 선택하는 비겁하고 천박하고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저주를 타인, 미래의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다. 늘 쉬운 길을 택하려고 하는 당신 하나 때문에 당신의 미래와 세상은 더욱 암울해진다.

겸손한 마음을 가져라.
나의 부족함을 정확하게 인지하라.
내면에 감추어진 비겁함, 악의, 원한, 증오를 인정하라.

무엇보다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하지 말라.
하루하루 더 나은 삶을 살아가라.
쉬운 길보다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


우선 스스로를 심판대 위에 올려 세우는 짓을 멈춰야 합니다. 자기반성 및 성찰을 통해 자신의 그릇된 행동을 고치는 것과, 스스로를 정죄하여 괴롭히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변화를 위함이고 후자는 현상유지를 위함이죠. 변화는 두렵고, 현상유지가 편해서 이대로 있고 싶지만 막상 이대로 있으려니 죄책감에 시달릴 때,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심판대 위에 세워두고 처형하곤 합니다. 자신과 싸우고, 자신을 비하하고, 비난하고, 혐오하는 행동이죠. 그러나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고통으로 몰아가는 사람에겐 온전한 사랑의 정신이 깃들기 힘듭니다.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어...'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에 저항하게 됩니다. 때문에 스스로에게 악인이 되길 자처하는 사람은 그 어떤 존재와도 모순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적인 갈등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기만을 추적하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때로 체면치레의 말을 하기도 하고, 때로 당면한 주제에 대한 무지함을 감추려고도 애쓰며, 때로 타인의 말을 들먹이며 스스로 생각하는 책임을 회피하기도 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등장하면 모든 게 해결될까요? (악인이라 규정된) 스스로를 수용하길 거부하는 상태에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사람이 등장했다고 한들, 그의 호의는 악인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감정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심지어는 이런 보잘것없고 악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그 사람도 필시 보잘것없으리라 여기며 그 사람에 대한 가치도 함께 폄하시켜 버리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는 이 끔찍한 저주는 낮은 자존감과 자기 파괴적 성향에 기인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고통 속에 거하며 행복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위안을 얻습니다. 이 감정은 자기 분열의 초기 증세와 마찬가지이죠.


스스로에게 경멸을 느끼고 나무라는 동안, 쉴 새 없이 자기비판을 하는 동안, 비난받아 마땅할 추악하고 더러운 나의 내면에서 적어도 심판자로 존재하는 나의 일부분은 면죄부를 얻습니다. 경멸을 느끼고 비난을 쏟아내는 바로 그만큼 위안을 얻게 됩니다. 스스로를 정죄하면서 쾌락을 얻는 그는 처벌받아 마땅한 자신을 벌하며 자신의 도덕적 신념과 양심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자신은 누구이며 또 그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심판자는 누구인가요? 그에게 그럴 자격은 있는 건가요?


거짓은 사실에 대한 잘못된 진술만이 아니다. 인간을 사로잡으려는 모든 음모적 행위가 거짓이다. 무해하고 사소해 보이는 겉모습, 약간의 교만과 함께 사소한 책임 회피를 목적으로 거짓을 부추긴다. 이 모든 것으로 거짓의 실체와 위험이 교묘하게 감추어진다.

그리고 작은 거짓이 가장 사악한 행위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 역시 감추어진다. 거짓은 세계를 타락시킨다. 그것이 거짓의 목적이다. 거짓말은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수백만 명이 목숨을 읽은 것은 나치와 공산주의의 거짓말 때문이다.


선인과 악인을 나누는 기준을 뭘까요? 우리는 과연 좋은 사람일까요? 여기에 누군가 그 어떤 그럴듯한 답을 내놓든 그 논리는 인류 만고 불변의 법칙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악인에 정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대답이 갈릴 수 있으나 우리는 대체로 갈등 상황에서 정반대로 대립한 대상을 악인이라 규정합니다. 악인은 자기 보호 본능에 위배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악인을 옆에 두고자 하는 이상한 본능에 휩싸입니다. 처음에는 삐걱거리며 맞춰가는 듯해 보이던 관계도 충동적인 방어기제가 올라오면 결국 서로를 파괴하는 연속적인 고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서로를 파괴하는 관계는 때때로 당사자로 하여금 정서적으로 그 관계에 의존하는 양상을 불러일으키며 가학적 상황에 자신을 내맡기게 하죠.


그러고 보니 참 이상합니다. 나는 스스로의 악함을 누구보다 잘 깨닫고 있다고 여겨왔는데, 그래서 스스로를 응징하려고 했는데... 옳지 못한 방법으로 상황을 악화시키고, 나쁜 상황에서 더욱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걸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과연 스스로를 심판대에 올려두는 일인 걸까요?


우리는 깨달아야만 합니다.

스스로를, 그리고 타인을 재고 따지고 규명했던 '가치'라는 것이 사랑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을. 가치를 보고 대가를 주고받는 것은 시장의 원리이지, 사랑의 원리가 아니라는 것을. 사랑을 하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은 오직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죠. 나를 사랑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지 있는 그대로의 '나'일뿐이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담긴 의미는 서툴고 부족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도와주는 것처럼 나약한 당신을 포용하고 사랑하라는 뜻이다.


자신의 불안과 결핍을 인정한다고 해서 가치 없는, 사랑받을 수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내면과 상처, 고통을 수용한 사람은 그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화내고 공격했던 것이 사실은 스스로를 찌르는 행위였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타인의 고통을 인위적으로 끌고 들어와 자신의 고통으로 만드는 시도를 멈추게 됩니다. 수동적으로 상처받는 아이의 형태를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내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나를 해칠 수 없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마음이 적대감의 감정에서 연민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아가페적 사랑'의 시작입니다. 때문에 존재 그 자체에 감사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야말로 한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 이 세상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를 구해 주는 것은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또한 자아실현을 위해 현재의 자아를 희생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혹은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자신이 내린 불완전한 잣대에 비춰 우월한 면을 가진 나와 열등한 면을 가진 나를 분리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기억 속 한 편의 나는, 누구나가 그렇듯 못났고, 천박하기 짝이 없는 데다 잔혹하고, 정직하지도 않으며, 어느 것 하나 특별한 구석도 없이, 악한 생각도 악한 일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기억 속의 나는, 누구나가 그렇듯 악한만큼 선한 면도 있고, 누군가에게 다정하게 굴 줄도 알며, 가끔은 멋진 면도 보여줄 수 있는, 실수해도 얼마든지 살아갈 권리가 있는 특별한 사람이죠.


<12가지 인생의 법칙>을 포함한 수많은 책과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유일한 진리는, 세상은 단편적인 선악론으로는 나눌 수 없는 것들 투성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결국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힘들었던 일, 슬프고 상처받았던 일, 잊고 싶은 악몽 같은 일조차 지난 후에는 모두 '나'라는 이야기 속에 모여들게 됩니다. 우리가 쌓아온 이야기는 차곡차곡 각자의 안에 모여 스스로를 구성하는 바탕이 됩니다. 그 사람이 쌓은 이야기는 곧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에는 선악이 공존합니다. 우월함과 열등함이 함께합니다. 비범함과 평범함이 뒤섞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특정한 기억만 떠올리면서 나의 모습 중 일부는 부정하거나 잊으려고 합니다. 실패한 과거만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것도, 성공한 시절만 추억하며 환희에 젖어있는 것도 우리의 모습을 전부 담아내고 있지 않습니다. 지나간 나의 모든 모습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지금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니체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공부하며 한정된 공간의 에너지는 무한한 시간 속에서 결국 동일한 순서를 반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영원회귀'라는 이론에 다다랐습니다.

이 세상이 일정한 크기의 힘과 일정한 수의 힘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면, 존재의 거대한 주사위놀이 속에서 계산 가능한 수의 조합들을 계속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다. 무한의 시간 속에서 가능한 모든 경우의 조합이 빠짐없이 한 번 씩은 나타나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무한히 여러 차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조합'과 다음 번에 그것이 '다시 되돌아오는 것(회귀)' 사이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조합들이 일어날 수 밖에 없고, 또 그 각각의 조합마다 전체 조합들이 일어나는 순서에 있어서 똑같은 조건인 만큼, 절대적으로 동일한 순서의 순환이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
- 니체, 『유고』 中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모든 것이 같은 차례와 순서로 ㅡ 나무들 사이의 이 거미와 달빛, 그리고 이 순간과 바로 나 자신도.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가 거듭해서 뒤집혀 세워지고 ㅡ 티끌 중의 티끌인 너도 모래시계와 더불어 그렇게 될 것이다! ㅡ 그대는 땅에 몸을 내던지며, 그렇게 말하는 악령에게 이를 갈며 저주를 퍼붓지 않겠는가? ... "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라는 질문은 모든 경우에 최대의 중량으로 그대의 행위 위에 얹힐 것이다! 이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봉인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그대 자신과 그대의 삶을 만들어나가야만 하는가?
- 니체, 《즐거운 학문》 341절 中

정반합이 계속해서 이어지듯 모든 가치는 반대되는 가치로 변하고, 또 그 가치는 이어지는 낮과 밤처럼 번갈아 뒤집히며 반복될 것입니다. 대립되는 '옳고 그름'의 가치가 왜곡된 세계에 우리를 붙잡아 두기위해 적당히 꾸며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의 무분별함과 경솔함은 곧 자유와 명랑함이 되기도, 삶을 즐기기 위해 깨어있는 태도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쌓아온 이야기가 수없이 반복된다면, 그 반복 속에서 우리의 삶을 정당화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결코 선과 악의 가치 판단이 아닙니다. 발전 혹은 퇴화를 논하게 될 특별한 징후도 아닙니다. 수없이 반복되는 세계 속에 있더라도 자신의 과제와 사명을 계속해서 찾아나가는 것을 놀이로 여기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과 자신을 살아 있게 하는 모든 것을 긍정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단 한 가지의 진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쌓은 그 모든 이야기는 이전에도 나였고, 여전히 나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내가 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