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 심리분석가가 알려주는 혼란한 시기를 넘는 법

제임스 홀리스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큐레이션


인생이란 누구도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알고 난 뒤엔 이미 늦은 거야.
몸에 배어버려 지금까지와 다른 것을 할 수도 없고,
그러다 보면 너는 네가 원하는 모습과는 완전히 멀어져 버린단다.
진정한 자기 따위는 영원히 잃어버리는 거야.

_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중에서


인생이란 여정의 중간 항로에서, 우리는 삶을 재평가하는, 무서운 한 가지 질문 앞에 설 기회를 갖는다. 이 질문에 잘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해방감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과 맡아온 역학들을 빼고 나면, 나는 대체 누구인가?”


거짓된 자기를 쌓으며 살아왔다고,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며 잠정적인 성인기를 보내왔다고 깨닫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진짜 존재를 만날 수 있는 2차 성인기에 들어설 수 있다.


중간항로는 1차 성인기라는 확장된 사춘기와 피할 수 없는 노년과 죽음 사이에서 한 인격을 재정의하고 전환할 수 있는 기회이자 통과의례다. 이 길을 의식적으로 여행하는 사람은 삶을 더 의미 있게 구축할 수 있다. 그러지 못한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삶은 화려할지라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 갇힌 채 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란 환경, 유전적 특질, 성별, 문화, 가정환경 등에 따라 심리적 렌즈를 장착하고 살아가고 있다. 렌즈가 빛을 굴절하는 것처럼, 내가 보는 현실은 이 심리적 렌즈라는 녀석이 완전히 좌지우지하고 있다. 어떤 현실이든 어느 렌즈로 보냐에 따라 어느 정도 달라진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진정한 본성보다도 많은 경우 렌즈가 정하는 현실에 의지해 살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임상치료를 하다 보면 몇 세기에 걸친 가족의 역사를 그려보는데, 가족 계통의 가계도를 따라가다 보면 몇 가지 주제가 되풀이된다는 것이 나타난다. 가족은 유전 형질과 더불어 특정한 인생관을 세대에서 세대로 퍼뜨린다. 자식은 부모가 물려준 렌즈의 굴절된 관점으로 ‘선택’을 하고, 그 결과 역시 반복된다. 그렇게 렌즈를 통해 어떤 측면을 보는 만큼 다른 면들을 놓치게 된다.

중간 항로가 의미 있는 것은, 지금까지 가족과 문화로부터 얻은 렌즈가 실은 완전하지 않으며, 세상의 일부만 보여준다는 사실을, 그리고 불완전한 렌즈를 통해 결정을 내려왔고 그 결과 때문에 고통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물려받은 렌즈로부터 나오는 것은 조건부 삶,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아닌, 삶을 이렇게 보아야 한다는 부모(내면화된 초자아)의 목소리에 따라 키워진 결과로써의 삶이다. 그래서 치료의 초기에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옳으며 배운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은 있을 수 없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내가 그 방식에 길들여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따위는 거의 하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내면이 황폐한 사람은 성장과 변화를 이뤄낼 가능성이 비참할 정도로 낮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에 자신을 내놓아야 하는데, 그 일이 너무 공포스럽기 때문이다.


타고난 본성과 사회화된 자신 사이에서 우리 대부분은 그저 신경증 환자 수준으로 생존하고 있다. 숙고하지 않은 채로, 유년기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태도, 행동, 정신적 반사작용으로 이루어진 성격으로 반응할 뿐이고, 자신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유년기의 기억은 되도록 떠올리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다양한 신경증은 내면아이를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진화한 전략들이다.


자신이 사는 동굴 너머의 세계를 알지 못했던 원시인과 마찬가지로, 아이는 더 편안하고 더 오래 생존하기 위해 자신의 환경을 해석하려 한다. 플라톤이 유명한 우화로 말했듯 인간의 제한적인 이해 능력은 동굴에 갇힌 채 벽에 비치는 이미지만 보고 삶을 해석하는 죄수와 같다. 아이가 세계에 대해 내리는 결론 역시 자신이 아는 좁은 범위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아이는 “부모님에게 문제가 있었어요. 저도 그 영향을 받았죠”라고 말하지 못한다. 단지 삶은 불안하고 세상은 무서운 곳이라 생각할 뿐이다.


아이는 촉각과 감정을 현상학적 해석해 삶에 대한 신뢰를 형성한다. 부모의 행동을 관찰하며 그 안에 감춰진 개인과 세계에 대한 태도까지 내면화한다. 그로부터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해 중요한 결론을 도출한다. 부모가 특정 이슈에만 반응하는 등 매우 제한된 감정 경험을 토대로 우리는 자기와 세계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알지 못하는 것을 지금까지 알게 된 극히 일부의 기준만으로 평가하는 셈이니 그 결론 또한 지나친 일반화일 뿐이다. 우리는 생의 초부터 이렇게 편견에 사로잡혀 좁고 불완전한 시각으로 인식-행동-반응 양식을 쌓아간다.


성격의 전략들은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느냐에 달려있다. 현실에 짓눌리는 아이는 자신의 연약한 경계를 뚫고 타자가 침범해 오는 강렬한 아픔을 경험한다. 아이는 지금과 다른 생활환경을 선택할 힘이 없고 타인이라는 문제의 본질을 인식할 객관성과 경험을 비교할 근거가 부족하다. 때문에 아이는 자신의 연약한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강박적 성향, 회피성, 상호의존성을 ‘선택‘한다.


이런 상처와 내면아이에서 비롯된 다양한 무의식적 반응들은 성인기의 성격을 결정하는 강력한 요소다. 아이는 자유롭게 본성에서 나오는 성격을 구체화하기보다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세상에서 자신이 맡을 역할을 찾는다. 성인기의 성격은 초기 경험과 트라우마에 대한 반사 반응에 가깝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의 주인공이란 ”악덕이나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실수 때문에 불행에 빠진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실수’를 가리키는 말이 하마르티아 hamartia인데, 하마르티아는 종종 비극적 약점tragic flaw으로 번역되지만, 나는 그보다 ‘상처받은 시야 wounded vision’라고 부르고 싶다. 하마르티아는 인물이 어떤 행동을 선택하게 만드는 렌즈다. 무의식의 힘과 반사적 반응이 계속 쌓여서 어떤 선택이 내려지며, 후에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따라온다. 그리스 비극이 주는 삶의 교훈은 각자의 삶에서 주인공인 우리 모두가 비극적인 삶을 살 수도 있음을, 자신조차 잘 모르는 자신의 모습에 이끌어려갈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비극이 갖는 해방의 힘은 주인공이 고통에 시달리다 깨달음을 얻는 데서, 다시 말해 내면의 진실과 외부의 진실(신 또는 운명)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바꾸는 데서 나온다. 우리의 삶은 콤플렉스가 하는 일에 무지한 만큼, 그리고 본성과 실제 선택들 사이의 점점 벌어지는 간격을 깨닫지 못하는 만큼 비극이 된다.


인생의 위기감은 대부분 그 간격에서 나오는 아픔에서 비롯한다. 내면의 자기감과 후천적으로 획득한 성격 사이의 불균형이 너무 커진 탓에 더는 그 고통을 억누르거나 보상으로 달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보상 상실’이라고 한다. 예전에 사용하던 태도와 전략을 계속 써보지만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것이다.


중간항로는 물론 고통스럽지만 ‘자기 감‘을 바꿀 수 있는 멋진 기회를 선사한다. 중간 항로의 시작은 후천적으로 만들어낸 성격과 ‘자기’ 욕구 사이의 무시무시한 충돌이다. 과거의 나를 미래의 나로 교체해야 하며, 과거의 나는 숨통이 끊어져야 한다. 그러니 엄청나게 불안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조셉 캠벨이 말했듯, 인간은 낡은 자신을 소환해서 죽여야만 비로소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죽음과 재생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하나의 길이다. 자신의 잠재력을 깨우고 현명함을 얻어내려면 중간항로를 지나야 한다. 따라서 중간항로란 잠정 인격에서 진정한 성인기로, 거짓된 자기에서 올바른 자기로 옮겨가기 위해 내면으로부터 일어나는 소환 행위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