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지옥으로 내려가신 의미

제임스 홀리스,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큐레이션

융은 신경증을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의미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영혼의 고통”이라고 말했다. 고통은 이미 우리에게 지워져 있으며 그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누군가는 정신의 지각 변동으로 고통받는 것만으로는 삶의 궁극적 목적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중간항로에 수반되는, 여러 ‘자기‘의 충돌이 빚어내는 갈등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그리스어에서는 ’시간‘을 뜻하는 두 가지 언어가 있다. 크로노스는 순차적이며 일직선상의 시간인 반면, 카이로스는 깊이를 지닌 3차원 시간이다. 개인이 자신의 삶을 단순히 한쪽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연속이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로 볼 때, 의식의 충격을 경험해 수직 차원인 카이로스가 인생의 수평면인 크로노스와 교차하게 될 때, 비로소 개인은 삶을 3차원으로 조망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중간 항로는 ‘지금까지의 내 삶과 역할을 빼고 나면, 나는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 비로소 시작된다. 이런 거대 질문은 삶에 가치와 존엄을 부여한다. 이를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사회의 길들임과 진부함, 그리고 끝내는 절망에 자신을 맡기게 된다. 운이 좋아 살면서 충분한 아픔을 겪는다면, 주저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국엔 의식적으로 그 질문들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용기 있고 자신의 삶을 돌볼 수 있다면, 고통을 겪으면서 진정한 삶을 되찾을 수 있다.


20세기 미국의 소설가 제임스 에이지는 자전적 소설에 이렇게 되새긴다.

“나는 집안에서 사랑받는 존재이지만, [어른들은] 아마도, 아마도 지금은, 아마도 영원히, 아니 절대로,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의해 정의되고 지배당하기 쉽다. 누군가의 배우자, 부모, 가장 제도화된 역할에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 역할에 투사해 버린다.


내 지인 하나는 박사학위, 가정, 저서 출판, 안정된 교수직까지 원하던 모든 것을 28세에 이뤘다. 이후 10년간 글을 더 쓰고 자녀를 더 낳았으며, 더 좋은 교수직을 얻었다. 이 모든 행동은 겉으로 볼 때 생산적이었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정체성을 투사하는 커리어 상승이었다. 하지만 커져 가던 우울증이 터져버렸고, 결국 기력과 삶의 의미를 거의 잃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족을 떠나 다른 도시에서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고 있다.


그의 결정은 이전 삶에 대한 과잉보상일까? 중간항로가 자신에게 던진 유익한 질문을 억누른 걸까? 아니면 삶의 후반부를 보낼 최선의 방법을 찾을 걸까? 이 모든 질문의 답은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으며, 그 자신만이 답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지난날의 실수와 순진한 행동, 그리고 투사된 가치를 되돌아보면서 슬퍼하며, 심지어 창피해하기도 한다. 실수하고 수줍어하고 금기에 억눌리고 잘못 지레짐작하면서 어린 시절의 테이프가 돌아간다. 인생의 후반전에 접어들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는 무의식이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죄를 이해하고 용서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도 의식적으로 살지 못한다면,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유년기에서 성인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죽음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는 투사로 가득했던 의존적 유년기를 ‘살해‘하는 과정이다. 부모의 세계에 의존하며 살았던 아이는 이를 극복하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과제를 해결해 나가도록 자신의 이상적인 부모와도 정신적으로 분리되는 과정이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그러한 죽음이 있어야 비로소 부활, 재생, 개인의 재탄생을 인정받는 과정을 겪어 성인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배울 수 있다.


인생에 마지막에 이르러 상실감과 죽음을 직면해야 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남은 삶이 여전히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이들과, 삶이 고통과 두려움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다. 삶이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이들은 이미 삶의 전반기에 치열하게 싸웠으며, 1차 성인기에 죽음을 경험하고 삶의 더 큰 책임을 받아들였다. 성인기로 진입했을 때, 죽음을 경험하고 삶의 더 큰 책임을 받아들인 이들은 삶의 마지막 단계도 더 강한 의식을 가지고 보낼 수 있다. 죽음을 회피한 이들은 그다음에 다가올 죽음에 사로잡혀, 의미 없는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하며 눈을 감는다.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차라투스트라가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스스로 ‘몰락’의 길을 내려간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그대처럼 내려가야 한다.
내가 저 아래로 내려가 만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듯이.
보라! 이 잔은 다시 비워지기를 바라고,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인간이 되고자 한다.
이렇게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여기서 니체가 사용한 ‘몰락(going-under)’은 차라투스트라가 10년을 머무른 산에서 내려가는 하산을 의미한다. 몰락은 보통 부정의 의미로 쓰이지만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태양이 내려가야 다음 날 다시 떠오를 수 있는 것처럼 변화와 시작, 상승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내려감’을 의미한다.


사도신경에도 이런 표현이 나온다.


“(예수께서)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이 구절을 가톨릭, 개신교 영문 번역본으로 보면 이렇다

he descended into hell;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우리가 하는 그 hell(지옥)이 맞다.

라틴어 원문 또한 이렇게 나와있다.


DESCENDIT AD INFERNOS
데스켄디트 아드 인페르노스
지옥으로 가시어


여기서의 인페르노스는 큰불, 지하세계 즉 지옥이라는 의미이다. “신의 아들인 예수가 지옥에 내려갔다니? 신성모독 아닌가? 사도들이 신성모독을 퍼뜨리다니, 어디 천인공노할…!” 이렇게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인간의 심리 구조와 정신분석에 대해 아직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낱말은 기독교적 맥락에서도 ‘인간세계로 내려감’ 또는 ‘인간이 됨’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도리어 긍정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 한 번은 마주해야 할 죽음은 이런 의미다. 진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으려면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죽어야만 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불멸>에서는 이 세상이 어린아이들이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거대한 역할극과 같다는 묘사가 나온다.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거물조차 상당수가 거대한 역할 속에 갇힌 어린아이 일 뿐이다. 어린아이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로 자신의 역할이 곧 자신이라고 믿으며 충실하게 자신에게 부여된 대사와 행위를 수행할 뿐이다. 그중 가장 많은 무의식의 짐이 얹힌 역할극은 단연 결혼일 것이다.


(정신적으로) 부모를 잃고 세상에 나온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엄청난 기대를 연애나 결혼에 짊어진다. ’내 삶을 좀 더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당신에게 의지하겠어.’, ’당신이 내 맘을 읽어 내 모든 욕구를 미리 알아주길 기대하고 있어.’, ‘당신이 내 삶의 모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길 바라.‘ 결혼생활이 실패로 끝나는 이유는 대부분 이런 기대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인들은 마침내 어디선가 만나는 게 아니다.
처음부터 서로의 마음속에 있었을 뿐.
_루미(페르시아 시인)


졸업식 축사에서 우리가 현실을 그대로 얘기할 수 없는 것처럼, 결혼에 관해서도 주례사에서는 말할 수 없다. 몇 년 이내에 당신들 중 대부분이 당신의 직업을 증오하고 권태를 느끼게 될 것이라는 사실과 동일하게, 몇 년 이내에 당신들은 당신의 배우자(혹은 연인)를 증오하고 권태를 느끼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용한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그들의 일이 그들을 모욕하거나 의기소침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원하던 목표를 달성한 사람들도 권태로 종종 괴로워한다. 성과와 업적으로 자신이 보잘것없다는 생각을 극복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다 결국 또 투사의 결과물이었던 자신의 일에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삶이 권태로워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유년기 때부터 사랑에 대한 환상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무의식적 바람을 받아낼 수 있는 누군가에게 그 이미지를 투사한다. 그리고는 마침내 운명의 상대를 찾았다고 믿어버릴 뿐이다. 날마다 누군가와 함께 생활하다 보면 투사는 자동적으로 벗겨진다. 내가 영혼을 바쳤던, 기꺼이 내 마음을 열어 맞아들인 사람도 알고 보면 결국 나처럼 두려움과 욕구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내가 그 사람에게 그랬듯 자신의 무거운 기대를 내게 투사하는, 나와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 어떤 결혼이든 무거운 짐이 따른다. 한때 부모가 맡았던 친숙한 타인Intimate Other에 가장 가까운 복제품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투사를 버리는 일은 자신 속에 늘 존재하던 기대와 희망을 버리는 일이라 죽을 만큼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 전제조건이다. 외부세계가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버려야 스스로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생긴다. 두려움에 가득 차 어른들이 구해주기만 기다리던 내면아이의 옆에 이를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에 눈치챌 수 있다. 투사를 인식하고 깨달음으로써 유년기로부터 자신을 해방하는 거대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