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홀리스,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큐레이션
낭만적 사랑만큼 서로 확실히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과 희망, 그리고 마치 집에 돌아온 듯한 아늑한 느낌을 선사하는 것은 없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장기간의 친밀한 관계인 결혼만큼 사람들에게 상처와 실망을 많이 주는 것도 없다.
날마다 함께 생활하다 보면, 이전의 투사는 무자비할 정도로 깡그리 지워진다. 타인은 타인일 뿐, 나의 거대한 투사를 원하지 않으며 거기에 맞춰줄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중년에 이르면 ‘당신은 내가 결혼했던 그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하게 된다. 사실 한순간도 배우자가 그 사람이었던 적이 없다. 배우자는 언제나 타인이었으며, 그전까지 잘 몰랐다가 결혼생활을 하면서 조금 더 알게 된 낯선이 일뿐이다. 아니마 아니무스가 그 사람에게 투사된 탓에 우리는 자신이 잃어버렸던 부분과 사랑에 빠졌을 뿐이다. 때문에 이를 잃었을 때 큰 충격에 빠진다. 우리가 결혼생활(혹은 연애)에 너무 많은 희망과 욕구를 걸기 때문에 그만큼 실망할 가능성이 커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년에 이르러 삶을 돌아봤을 때, 몇십 년 전에 선택한 결혼과 직업이 사실 얼마나 무의식적이었는지를 깨닫고 화들짝 놀란다. 연인들은 가장 격렬하고 광기에 차 있던, 비정상적인 상황이던 바로 그때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할 거라고 맹세해야 한다. 젊을 땐 쉽게 사랑에 빠지고 그 마음이 일생동안 변치 않을 것을 약속하고 결혼해 2세를 만든다. 그러나 그 여정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배우자 사이에 수없이 많은 긴장과 피로가 얹혀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결혼과 연애, 그 중요성과 역할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우선 친밀감의 본성을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류역사상 대부분의 결혼은 사회 가치, 인종, 정통과 권력을 유지하고 전파하는 주축이었다. 가장 알기 어려운 감정,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혼보다 오히려 중매결혼이 더 잘 유지되어 왔다. 낭만적 기대와 서로에 대한 투사 위에 자리 잡은 결혼보다는 현실적 필요에 따른 결혼이 더 오래갈 확률이 높은 것이다.
관계에서의 기본적인 진실은 개인이 의식적으로 경험하지 않는 모든 것을 상대에게 투사한다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당사자만은 한동안 투사를 지속할 수 있다. 분명히 투사 이면에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 있으며, 그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무거운 안건을 우리에게 투사하고 있다. 차트에 오른 히트곡 가사를 전부 하나로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비참했던 나의 인생이 당신을 만나고부터 모든 게 새로워졌고 우리가 마치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올라앉은 것 같았지만 당신은 변해버렸고 우리가 나눈 것들은 사라졌고 당신은 떠나갔고 이제 다시 나는 비참해져서 다시 사랑에 빠지지 않을 거야, 다음번 사랑이 올 때까지는.”
결혼생활(연애)을 지속하려면 ‘내면아이‘라는 짐을 견뎌야 한다. 친밀한 애정관계의 진실은, 내가 나와 맺는 관계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따라 관계 대상인 타인을 선택하는 일은 물론 그 관계의 질 또한 달라진다. 모든 애정관계는 우리 내면의 삶을 보여주며, 어떤 관계도 우리 자신의 의식과 맺는 관계보다 나을 수는 없다. 사실 투사가 문제라면, 우리가 상대에게 많은 걸 원하지만 않으면 부담될 일도 없다. 하지만 내면아이의 기대를 이행하지 못하는 관계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할까?
융은 이렇게 말했다.
“의미는 딱 한 가지,
다른 모든 것은 진부하며 버려도 된다는 사실에 있다.
경력이니 자녀를 만드느니 하는 일은
삶이 의미 있다는 바로 그 사실에 비교하면
모두 허상의 산물일 뿐이다.”
’ 마법처럼 우리를 구원해 줄 타인‘에서 ‘인생의 더 큰 의미를 찾는 데 애정관계가 하는 역할‘로 질문을 옮겨보자. 세계의 거대함과 맞닥뜨린 개인은 완벽해지려면 혼자로는 부족하다고, 다른 사람으로 자신의 반쪽을 채워 완벽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자연스럽게 이런 희망을 품지만 사실 서로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일상의 마찰로 희망에 따르는 투사가 사라지면 우리는 의미를 상실한다. 정확히는 우리가 타인에게 투사한 의미를 잃는다. 각자가 자신의 정신적 안녕을 온전히 책임진다는 전제하에 성숙한 관계에서는 ‘제한 없는 자유로움’이 필요하다. 두 사람은 각자 우선적으로 자신의 ‘개성화’를 추구한다. 관계를 통해 서로 지지하고 격려하지만, 서로의 발달 또는 개성화에 필요한 과제를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이 태도는 상대가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함을 의미한다.
자신에게 더욱 충실해짐으로써 둘 간의 관계를 지속해 나가는 것이 모든 애정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성숙한 관계는 관계 당사자 각자가 스스로를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 그러지 않으면 모든 관계, 결혼생활은 정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숙한 관계를 위해서는 ’내가 가장 절실히 원하고 필요한 걸 아무도 내게 주지 않아. 나만이 할 수 있어. 그래도 나는 우리 관계를 축하할 수 있고, 우리 관계가 내어주는 것을 위해 투자하겠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관계가 주는 것은 친밀한 교제, 상호 존중과 지지, 그리고 정반대의 변증법이다. 흔들리는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애정관계를 이용하는 이들은 성숙한 관계에 필요한 수양을 얻을 기회를 잃는다.
확실한 무언가를 원한다면 차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단순히 나와 비슷해서 좋았던 상대의 다름을 사랑하는 어려운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그 다른 점 덕분에 자신이 성장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투사를 그만두고 내면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면 스스로의 영혼의 거대함을 깨닫게 된다. 배우자는 그저 그 과정에서 내가 정신의 가능성을 넓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었을 뿐이다.
릴케는 애정관계를 “서로의 고독을 나누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이것이 진실이다. 결국 우리 모두에게 남는 건 고독이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씌운 투사는 오래가지 않지만, 투사가 떠나간 자리에서는 더욱 풍성한 관계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