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치료 과정에서 드러나는 여성과 남성의 차이

제임스 홀리스,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큐레이션



미국의 심리학자 캐럴 길리건은 애정관계에서 짊어져야 할 요구가 너무 크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보다 자신의 개성화 욕구를 지지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했다. 여성의 의식이 갖는 가장 큰 특징은 ‘확산’으로, 여성이 자신의 환경과 자신에게 주어진 요구를 매우 잘 인식한다는 뜻이다. 여성들은 자신이 원하는 걸 해주지 못하는 가족, 종교, 국가에 자신이 봉사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면서 모두에게서 떠나버리고 싶으면서도, 미지의 세계로 도약하고 싶은데 의무와 죄책감에 발이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딜레마를 품고 있다.


이전 세대에 비해 확실히 지금은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는 일이 수월해졌지만, 아직도 많은 여성들이 타인으로 인해 이런저런 구속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 따라서 여성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될 수 있는 권리를 되찾으려면 남성보다 더 큰 도전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여성은 타인의 요구와 스스로를 위한 의무 사이에서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 순교자인 척하는 사람은 결국 좋은 어머니도 좋은 배우자도 되지 못한다. 본받을 만한 여성으로 살았더라도 외부의 요구에만 순응한 대가를 자기 자신과 타인 모두가 치르게 될 것이다.


유년기의 애착욕구는 흔히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아주 강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자기의 가치와 안전을 위한 수단인 애착 욕구가 자신이 아닌 타인을 향하고 있다면, 성숙함이 부족한 것이다. 애착 갈망이라는 말은 타인을 향한 자연스러운 욕구를 감당할 수 없게 된 상태를 가리킨다. 우리는 항상 스스로의 동반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계속 놓치게 된다.


대부분의 여성은 부정적인 아니무스(융이 설명한 여성 안의 남성성)가 목덜미를 쥘 때 저항할 힘이 없다. 아니무스는 원래 여성의 내면에서 스스로의 욕구를 달성할 수 있는 자율권을 상징하지만, 어머니의 역할 속 그림자에, 아버지의 격려 혹은 방해 속에, 그리고 사회가 주는 숨 막히는 역할 아래 숨는다. 여성은 전통적으로 남편과 자식의 업종을 통해 성취감을 느껴야 한다는 말을 주입당해 왔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인 메리 벤슨의 일기에는 결혼과 교회라는 두 제도가 어떻게 한 여성을 정의하고 재단하는지 나와있다.


내 생애 전부가… 분명하고 끊임없는 요구에서 파생되었다는 마음속 끔찍한 기분…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어떤 권력도, 사랑도, 욕구도, 새로운 계획도 없다.
남편이 모든 걸 소유했고, 남편의 삶이 내 삶을 완전히 지배했다.
너무 오래 피상적인 삶을 산 느낌이다.
의도하지 않았고 딱히 잘못한 것도 아닌 그런 삶을 살았다.
그저 대답만 하는 하인 같은 존재였을 뿐 중심은 없었다.
신이시여, 제가 인격을 허하소서.


당신도 메리와 같은 삶을 살아오진 않았나? 메리의 일기를 보고 슬픔을 느끼는 만큼, 주어진 구속이 너무 버거웠다고 메리를 용서할 수 있는 만큼, 우리는 결국 메리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인격은 하루아침에 신이 내려주는 게 아니라 의심과 부정이라는 악마와 매일매일 투쟁해서 얻는 것이다. 이혼율이나 여성보다 짧은 남성의 기대수명을 고려해 보면, 부양할 자식이 있든 없든 재정적 여력 없이 여성 혼자 살게 될 확률이 80%는 된다. 여성의 삶에서 독립을 가능하게 하는 직업과 배우자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한 자존감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 말에는 낙관적 전망도, 안정된 결혼 생활을 폄하할 목적도 없다. 다만 순수한 진실일 뿐이다.


여성은 대개 삶의 중턱에서 버림받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때가 있다. 그때서야 자신의 내면아이가 재빨리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대개의 여성들이 심리치료를 받으면 최소 1년간 슬픔과 분노를 표출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는 불신감을 극복하고 백지가 되어버린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필수적인 시간이다. 그 뒤 1년은 새로운 삶을 위해 에너지를 모으는 시간이 된다. 경제적 자립을 위해 직무기술을 배우거나 이를 갖추는 데 필요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떤 경우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이용했다고 느끼는 데서 나아가, 자신 역시 스스로 그렇게 되도록 무의식적으로 결탁했음을 인정하는 과정을 겪는다.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더라도 그에 좌우되거나 종속되지 않겠다고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는 용기를 얻는 일이야말로 여성들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다.




반대로 많은 남성이 겪는 커다란 문제는 마음이 굳어버렸다는 점이다. 감정과 본능적 지혜를 회피하고 내면의 진실을 무시하도록 길들여진 보통의 남성은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낯선 사람이며, 돈-권력-지위의 노예다. 20세기 영국 시인 필립 라킨은 보통의 남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의무와 책임을 따르는 일에 무력하게 짓눌리고 표류하며
한때는 삶을 달콤하게 해 주었던 모든 것에게 버림받은 채
나이 듦과 무능력의 어두워져 가는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


현대 문화에는 남성이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도록 이끌거나 허락하는 모범적 방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남성들에게 지금 기분이 어떠한가 물어보면, 그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는 자기 ‘외부’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등을 답하기 일쑤다. 남성이 자신 안의 여성적 영혼(아니마: 융이 설명한 남성 안의 여성성)과 어떤 관계도 맺고 있지 않는데 어떻게 실제 여성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외부의 여성은 그 남성의 내면을 연결하는 역할을 할 수 없다. 단지 남성이 투사하는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중 일부만 만족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현대남성들은 전통적 역할을 강요하는 사회적 거대한 압박에 맞서, 자신 안의 진정한 모습을 탐색하려는 움직임이 점점 커지고 있다.


미국의 정신분석가 로버트 홉키의 저서 <남성의 꿈, 남성의 치유>에 따르면 남성이 치료 세션에서 자신을 내재화하고 실제 감정을 직면하는 데까지만 해도 약 1년이 걸린다고 한다. 평균적인 여성들을 치료를 처음 시작할 시점까지 오는 데만도 남성은 1년이나 걸리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 말은 사실이다. 그런데 과연 어떤 남성이 단지 치료를 시작하기 위해 1년씩이나 투자하겠는가? 그러다 보니 여전히 대다수의 남성들은 길을 잃고 표류한다. 남성들 역시 가부장제의 희생자일 뿐이다. 권력이 있느냐 없느냐만이 자신의 남성성을 보여주는 표시라고 보는 사회적 압력 아래 자신의 감정을 짓눌려 왔기 때문이다.


자신을 탐색하는 여정을 시작한 남성은 자신의 공포에 직면하여 또다시 해묵은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질문은 간단하다.


“내가 원하는 건 뭐지?“
”내 기분은 지금 어떻지?“
”기분이 좋아지려면 나 자신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겸손하게 질문을 던지고 마음이 답하도록 허락하라. 그러지 않으면 어떤 기회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며,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형편없는 동반자가 될 것이다.


부모가 키워준 외면의 껍질이 떨어져 내리고 나면 자신이 누구인지,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새로이 자문해야 한다.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으려면 자신을 가로막는 내면의 콤플렉스를 더 자세히 인식해야 한다. 아니무스가 지닌 부정적 에너지는 의지력, 자신감, 믿음을 좀먹는다. 그러나 아니무스에는 자율권, 원하는 걸 쟁취하기 위해 싸움에 뛰어드는 능력, 삶의 동력에 대한 자기주장 같은 긍정적 에너지도 있다. 이런 긍정적 에너지를 아니무스가 알아서 전해주지 않는다. 쟁취해야 한다.





니체는 결혼이란 “거대한 대화”라고 말했다. 오래도록 진실한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누군가와 오랫동안 친근함을 나눌 준비 역시 되지 않은 것이다. 노년 부부 상당수가 이미 오래전에 대화가 단절되었다. 그 이유는 개인이 스스로 성장하기를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개인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면 상대는 누구보다 흥미로운 대화 상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상대를 위해서라고 착각하면서 배우자의 성장을 가로막는다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분노와 우울에 가득 찬 사람과 살게 될 거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자신의 성장을 막는 일은 절대 용납해선 안된다.


변하지 않으면 분노로 시들고 성장하지 않으면 안에서 썩어 죽어버린다. 계속 변화를 거부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필요한 책임을 지려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삶에 거부권을 행사할 자격이 없다. 타인의 성장을 방해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으며 이는 명백히 영혼의 범죄다. 내 삶의 의미를 구현할 의무를 배우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잠재력을 활성화할 기회를 새로이 얻을 수 있다.


마법 같은 타인의 존재를 믿는 것은 잔인한 자기기만이다. 만일 당신이 그런 사람을 찾았다면 투사의 결과일 뿐이라고 확신해도 된다. 우리는 항상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는 거대한 사실에서 도망치려 한다는 점을 기억하라.


결혼이 각자의 개성화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빨리 받아들일수록 결혼생활을 오래 지속할 가능성도 커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머릿속 스트레스와 마음속 공허함이 어찌어찌 사라질 것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하지만 실제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로 10년이 지났다고 상상해 보라. 이대로는 안된다,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솔직하게 도움을 청한다면 결혼생활을 새롭게 되살릴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배우자는 구원자도 적도 아니고, 그저 배우자일 뿐이다. 과거에 그들을 힘 빠지게 했던 패턴뿐 아니라 미래를 위한 희망과 계획까지 다뤄보는 동반 치료와 더불어 자신의 발전을 위해 각자가 개인 치료까지 받는 것이 이상적인 부부 치료 모델이다.


- 당신의 과거 혹은 습관 중에서 관계를 망치거나 갈등에 빠뜨리는 것은 어떤 것인가?
- 자신을 위해 어떤 꿈을 가져봤으며, 어떤 두려움이 그 꿈을 막았나?


진정한 친밀감은 실패감, 두려움, 희망을 공유하는 일이겠으나, 아무리 오래 결혼생활을 해도 실제로 이를 공유하는 부부는 거의 없다. 서로의 마음속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부부 사이를 진실로 공고하게 해 준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을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나와 다른 배우자의 모습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타인의 경험을 뚜렷하게 상상할 수 있는, 그리하여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긍정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진정 사랑일지도 모른다. 진실한 대화는 이러한 상상을 도와주며, 자기애적 선입관이 잘못된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하는 해독제이다.


개인의 성장은 이기적인 욕구가 아니다. 개인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타인에게도 똑같은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말이다. 이건 두 배로 힘든 일이다. 자신을 온전히 책임지는 능력과 더불어 자신의 상상력으로 타인의 현실을 확인하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자신과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켜야 할 때다. 오래전부터 초대는 받았지만 정작 가보지 못한 그 약속 말이다.